<커뮤니케이션>"나" 아닌 "그들"의 언어로..

[ 교계 ] 복음전달자로서의 교회, 지나친 내부적 언어 사용으로 복음의 사역 제한 우려

김보현 기자 bhkim@kidokongbo.com
2005년 05월 27일(금) 00:00

교회력은 성령강림절 이후 주일을 '삼위일체 주일'로 지키고 있다. 성령의 강림으로 통해 이 땅에 교회가 탄생되고, 사도신경은 성령의 역사를 '교통'(communication)하심이라고 고백한다. '친교'(koinonia)와 '교통'의 의미를 새롭게 돌아보는 절기를 지내며, 복음의 소통자로서 교회의 현실을 진단해 본다.

성경은 '복음'(message)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이 복음을 증거할 '전달자(messenger)'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 가운데 가운데 전도자의 입장에서 경계로 삼아야 할 구절로 '악한 문지기'와 '버림받는 전도자'에 대한 말씀을 들 수 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태복음 23:13)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린도전서 9;27)

커뮤니케이션 분야를 연구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가 '게이트키퍼'(문지기, gatekeeper)에 대한 것이다. 사회적 사건이 언론등을 통해 대중에게 전해질 때 업무적으로 기능적으로 관계된 이들이 각각 독특한 방법으로 이 과정에 개입함을 말한다. 뉴스는 이 과정에서 '게이트키퍼'들의 특성이나 성격에 따라 원문과 달리 윤색되거나 해석되어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변질'내지는 '해석'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문지기'의 기본적 본분을 망각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질책하셨다. 외식에 빠진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야말로 사람들의 출입을 도와야 할 소명을 망각하고, 도리어 출입을 훼방하고 자신도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함으로써 진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본문은 이와는 대조적이다. 여기서는 말씀의 '매체'(medium)로서의 사역은 성실히 감당하였지만, 자신을 관통하고 자신을 통하여 전달된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이를 실천하는 데에는 실패하게 되고 마침내는 버림받을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길을 잃은 지도자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전에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소통의 도구들을 갖게 되었다. 청소년 시절 라디오를 벗 삼고, 집의 전화통을 독점했던 부모 세대들과 달리 요즘 청소년들에게는 이동전화과 그들의 입과 귀가 되어 있고, 인터넷은 정보와 오락의 도구이며, 친구요 무엇을 궁금해 해야 하는 것까지 알려주는 교사다. '선'(線)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통신 기술의 발달은 이제 단순한 모바일(mobile)의 개념을 넘어서 '언제 어디서나 있는'이라는 뜻의 라틴어 '유비쿼터스'(ubiquitous)를 꿈꾸게 한다. 장소와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히 네트워크제 접속, 전세계와 정보 교환과 의사 소통이 가능해진 세상을 향해 교회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무소부재'(無所不在)의 속성을 이야기 한다면 과연 이 세대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도시 안에는 물론이고 도시와 도시 간에 이전보다 수많은 도로가 개통되고, 다양한 교통 수단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날로 정체되어만 간다. 1년이면 인류가 가진 정보의 양이 배가된다 할만큼 많은 양의 정보가 축적되어 가고 정보의 저장이나, 검색, 전달의 방법은 더욱 빠르고 또 간편한 환경이 되었음에도 요즘 우리 사회는 더 많은 단절과 소통의 장애를 경험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눈을 교회 안으로 돌려보면 안타깝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외식(外飾)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 던지셨던 경계에 말씀이 그 안에서도 들려오는 듯하다. 비록 '악의'나 '고의성'은 없다 할지라도 과연 세상이 교회를 통해 복음으로 초청을 받고 있으며, 사역자들을 통해 성도들이 더욱 복음의 진리 안으로 다가가고 있는가. 냉정하게 살펴보면 도움보다는 장애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일제 치하의 문서 선교 운동에 헌신했던, 김인서목사와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그는 현재나 후세의 독자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글을 쓴다는 각오로 임했던 투철한 사역자였다. 그가 일선 목회 현장을 대신해 문서 선교에 투신하게 된 데에는 "교회 안에서 배포되는 선교 문서들의 난해성"이 자극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학자와 서기관, 바리새인과 논쟁을 하실 때에는 물론이고 갈릴리에 사는 '땅의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가르치실 때에도 비유와 주변의 사물들을 통해 '이해하기 쉽도록' 말씀을 전하셨던 것을 오늘 교회는 잊고 있는 듯 하다.

상대의 언어를 이해하라
1백20년 역사를 통해 교회는 '세상'의 언어적으로 많은 간격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언어로서 시대에 맞는 문법에 따라 개정 작업을 거듭, 한글 발전을 이끌고 맞춤법 적용에 선구적이었던 성경만 하여도 새로운 번역의 시도는 신학적 이유, 문법적 이유보다 때로는 '정서적' 이유로 인해 좌절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교회 안에서 부르는 찬송가 가사나, 예배시간에 사용되는 언어와 호칭, 심지어는 전도에 사용되는 용어들까지 이 시대를 사는 보통의 한국 사람들의 눈으로 돌이켜 보면 '난해성'은 물론이고, 너무나 강한 표현들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우리의 '고백'이나 '독백'이라면 표현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초대장이나 소개문을 쓰고 있다면, 송신자나 전달자의 중심에서 벗어나 수신자에 대한 배려를 잊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어부와 농부, 세관원, 통치자의 삶과 처지, 그들의 일상에 대한 이해가 예수님의 비유 속에 녹아 있음은 상대의 언어에 대한 예수님의 탁월한 이해의 단면을 보여준다.

요즘 들어 한국교회의 선교적 언어가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사회 봉사를 통해, 문화 사역을 통해 복음의 본질로 세상을 초청하고 있다. 교회들 가운데에는 영상 함께 들려주는 찬양곡을 통해 예배의 부름을 대신하기도 한다. 성가대의 찬양의 곡조를 몸을 통한 표현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아직은 모두가 새로운 시도에 불과하지만 복음을 이 시대와 세상 속에 전달해야 할 교회들의 의미있는 노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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