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로망스

[ 음악에세이 ] 유혜자의 음악에세이 85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5년 05월 17일(화) 00:00
어느 시인이 슬픈 아름다움이라고 한 말이 있다. 가벼운 감상(感傷)에 빠지지 않도록 뭉클하게 가슴을 울리는 선율, 이 슬픈 아름다움에 젖으면서 문득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생각이 미칠 때가 있다. 낭만적인 시정도 머금은 비에냐프스키의 '바이올린협주곡' 2번 D단조를 듣고 있으면 그렇다.

음악은 문학작품처럼 인간애의 정신과 인간성 탐구의 주제로 미적 구조를 지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삶의 실상을 구현하는 작업이리라. "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 '조화와 균형'이기 때문에 음악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는 견해에 동의하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폴란드 출생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비에냐프스키(Wieniawski, Henryk 1835-1880)는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나타내어 8살 때 고향을 떠나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다. 열 한 살에 그랑프리를 차지하고 졸업할 만큼 천재였다. 졸업 후 연주여행을 다니다가 다시 작곡 공부를 위해 파리 음악원에 들어간 것은 2년 후. 15살 이전에 연주자의 명성이 높아졌던지라 25세인 1960년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실 실내음악 주자로 영접 받아 한동안 그곳에서 활약하고, 음악학교에서 교편도 잡는 등 화려한 경력의 생활을 계속한다.

비에냐프스키는 폴란드에서 그보다 26년 먼저 태어난 쇼팽이 '피아노의 시인'으로 추앙 받듯이 '바이올린의 쇼팽'으로 불린다. 그의 음악에 폴란드 적인 색채를 담고 쇼팽처럼 천재적인 연주가이고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연주가로서의 경력이 화려했지만 그의 생존 당시엔 녹음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의 연주실력은 실감하지 못하고 작품으로만 짐작해야 한다. 그런데 전해오는 작품 수도 적어서 아쉽다. 바이올린협주곡 1, 2번, '화려한 폴로네이즈', '모스크바의 추억', '스케르쪼', 그리고 '전설'등의 작품만 전해온다. 그렇지만 바이올린협주곡 2번은 슬라브적인 우수가 깃든 중후한 울림과 정감이 뛰어난 작품이다. 바이올린이 가지는 기교에 의해 감미로움과 낭만적인 시정에 넘쳐 있는 예술성 높은 작품으로 이름이 높다. 물론 전해오는 작품이 적은 것은 작곡가로서 보다 연주가로서 인기가 높았던 것도 이유이겠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45살이라는 나이로 일찍 숨진 때문이기도 하다.

비에냐프스키의 생존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도 그의 2중음 주법(奏法)과 피치카토를 위한 왼손의 기교는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뛰어난 연주기교와 시정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던 그는 연주회에서의 환호가 사라진 뒤의 무한한 고독을 절감했던가. 그는 도박을 좋아해서 건강도 해치고 경제적으로도 곤궁해졌다. 따라서 차차 연주기술도 떨어지고 창작력도 쇠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은 빈곤 속에 45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흔히 예술가의 삶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편이다. 더욱이 후세 사람들은 예술가의 부도덕한 생활이나 불성실한 삶을 탓하기보다 그가 남긴 좋은 작품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유능한 작가의 경우엔 아쉬움이 남는다. 비에냐프스키의 경우도 그 부분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예술가의 재능은 애호가를 위해서만 쓰일 때 가치가 있을 것이다. 전문분야에만 쓰여야지 다른 분야에서의 낭비는 커다란 손실이 된다. 타고난 재주와 영감으로 감동적인 작품을 쓰는 것이 재능 있는 자의 의무와 책임일 것이다.

다시 한 번 비에냐프스키의 바이올린협주곡 2번을 들으면서 비애의 정서로 치우치게 되는 것은 그의 굴곡 있는 생애가 생각나기 때문일 것이다. 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아우어는 이 작품을 '구노, 생상,랄로의 영향을 받은 독창적인 영감과 아름다운 시정이 넘치는 고도의 예술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 작품의 2악장 로망스는 정열적이고 아련한 아름다움으로 단독으로 따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다.

한 작품도 걸작을 남기지 못한 예술가는 얼마나 많은가. 불멸의 로망스 악장만으로도 슬픈 아름다움으로 가슴이 미어지는데.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