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가신 길, 이제 우리가 걷습니다'

[ 아름다운세상 ] 아름다운세상/낯선 나라 제자들 큰 사랑으로 길러낸 왕마려선교사

진은지 기자 jj2@kidokongbo.com
2005년 05월 11일(수) 00:00
"왕마려선생님, 사랑해요."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육신의 부모는 아니지만 세상의 학문과 지식을 가르쳐주신 또 다른 어머니, 아버지들을 위한 스승의 날이 자리잡고 있는 5월, 벽안의 스승 왕마려 선교사와 제자인 양금희교수, 그리고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동안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내듯이 시간은 흐르고 흘러 직접 가르친 제자가 교수가 되었고, 이제 그 제자의 제자들이 한국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일꾼으로서 양육되고 있다.

제자와 학생들은 존경의 마음을 한껏 담아 소박한 카네이션을 드림으로써 대 스승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왕 선교사 또한 그동안의 기억들이 새삼스러운지 어린 학생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못했던 시절은 자취를 감추었는지 사제간 도가 허물어지고 예의가 실종됐다는 요즘이지만,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제자들을 품어내던 수많은 스승들의 헌신은 여전히 빛나는 신앙 전통을 이어가는 통로가 되고 있다.

프린스턴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고 반세기 전인 1956년 낯선 나라 대한민국에 첫발을 들여놓은 왕마려 선교사 또한 한국교회안에 기독교교육의 뼈대를 튼튼히 하고 근대화된 교수방법론을 도입해 기독교교육의 정체성을 견고히 한 주역으로 기억된다.

처음 왕 선교사는 영남지역에서 교육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권용근교수(영남신대 기독교교육)는 당시 왕 선교사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영남 지역의 기독교 교육 활동이 다른 지역을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 교육 선교사로 왔던 왕마려 선교사의 영향이 크다. 그는 프린스턴에서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하고 1970년대 영남 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아직 기독교교육학이 학문적 자리매김을 못하고 있던 때에 그는 교육이론가로서 실천가로서 화려한 활동을 했다.”(복음과 교육 1999년 5.6월호)

왕 선교사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기독교교육을 가르칠 수 있을까', '교육현장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그 때 가졌던 가장 큰 숙제였다"고 전하면서 "안식년이 되면 미국으로 돌아가 새로 개발되거나 도입된 교수방법론을 배우고 다시 한국에서 가르치곤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제 그의 제자들의 감당해나가고 있는 왕 선교사의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 선교사는 전국 곳곳을 다니며 강습회를 여는 등의 사역이 시간적 지역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기를 희망했고 여기에서 교회교육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담은 월간지 발간을 구상하게 된다.

"교사들이 말씀의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 내용을 학생들에게 재미있게 가르치도록 하기 위해 시청각자료를 만들고 매월 절기나 주제에 따른 각종 부교재를 제작했어요.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을 책으로 만들어내게 됐지요." 왕 선교사의 말처럼 이러한 고민과 노력에 의해 탄생한 것이 월간 교사월보다.

1974년 6월 10일, 첫 발간된 교사월보는 현재 영남신대 기독교교육연구소에서 발간하고 있는 복음과교육, 장신대 기독교교육연구원의 교육교회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서울로 사역지를 옮긴 왕 선교사는 1977년~1988년까지 장신대에서 기독교교육과 교수로 재직했고, 1981년 첫 발간된 기독교교육 잡지 교육교회 창간을 이끌었다.

기독교교육의 학문적 정체성을 든든히 하고 다양한 교수방법론 개발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을 통로를 확장시켜 온 왕 선교사는 학생들에게 있어 스승으로, 어머니로, 때로는 고단했던 시간을 함께했던 정다운 이웃으로 함께했다.

"나도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우리 왕 선교사님처럼은 못할거에요"라는 양금희교수는 왕 선교사와 관련한 '찌그러진 주전자'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는다. "종강 후 선교사님이 댁으로 30여 명이 되는 학생들을 초대하셨어요. 그래도 외국인에 대한 어느정도의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왕 선교사님이 몇십년도 넘었을법한 찌그러진 주전자를 사용하고 계시더라고요. 선교사님은 청렴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는 대신 장신대 학생들에게 교육실습실 마련해주기 위해 학교측에 기부금을 전달하셨거든요."

제자들에게 참스승의 모습이 무엇인지 뚜렷이 각인시켜놓은 왕 선교사는 은퇴 이후에는 부모님이 선교사로 사역하셨고 자신이 태어나기도 했던 땅, 중국으로 가서 선교사역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왔던 왕 선교사는 "도움이 필요한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평생의 사명"임을 알고 키르키즈스탄 카자흐스탄 케냐 콜롬비아 등 수많은 나라에서 선교사역을 했다.

현재 캘리포니아에 머물고 있는 왕 선교사는 PCUSA 산하 선교사 안식관에서 외국인들에게 영어와 기독교교육을 가르치는 등의 자원봉사 활동을 쉬지 않고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빌립보서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젊은 날의 헌신과 사랑을 쏟아부었던 한국에 대한 소망과, 그가 가르친 학생들의 열정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왕 선교사는 하나님전으로 가기까지 주어진 사명을 멈추지 않겠다고 전했다.

자신이 쌓아온 업적을 다른 이들의 공으로 돌리며 지극히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셨던 벽안의 노스승은, 수없이 거닐었던 교정에서 어린 학생들과 함께 채플을 드리며 놀랍도록 성장한 한국교회에 대한 한량없는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6월 말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학생들은 알고있을까? 한 스승의 열정과 헌신으로 지금의 더 넓고 깊은 학문의 토양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아마도 그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겨 이 민족과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을 널리 전하는 것일 것이다.

잘 알고 있는 스승의 노래의 가사처럼말이다.
"바다보다 더 깊은 스승의 사랑// 갚을 길은 오직 하나 살아 생전에//가르치신 그 교훈 마음에 새겨// 나라 위해 겨레 위해 일하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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