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마포삼열

[ 교계 ]

김훈 기자 hkim@kidokongbo.com
2005년 04월 28일(목) 00:00

*馬布三悅, Samuel A. Moffett

마포삼열은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건너와 45년동안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초기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성한 한국교회의 아버지이다.

그는 1889년 4월 15일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돼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포강변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처음 6개월간은 한국어를 공부하였고, 언더우드로부터 경신학교의 전신인「예수교학당」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몰두하였다. 1893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1년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정식으로 평양신학교 교장(1904∼1924)에 취임했다. 그는 한국인을 각별히 사랑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독립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였다. 또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냈다.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에 처한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1893년 10월 마포 삼열이 한국에 온지 9개월만에 평양 개척역사가 시작되었다. 개척 당시 평양은 인구 약 10만명의 도시였으며 복음의 불모지였다. 마포 삼열은 한석진과 함께 최치향이란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여관 손님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여관주인 최치향은 술꾼이었으며 도박과 색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포 삼열과 가까이 지내면서 점점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성경을 공부하고 가장 확실한 신자가 되었다. 마포삼열은 석달동안 낮에는 거리에서 밤에는 사랑방을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그리고 주일 아침에는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처럼 사랑방전도를 통해 3개월 후에는 7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한번은 깡패 청년 하나가 친구들을 동원하여 마포삼열이 살고 있는 방 창문으로 돌을 던져 넣었다. 그러나 집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후 그는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고 있는 마포삼열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오기가 생겨 다시 돌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 날아간 돌은 마포 삼열의 턱을 정통으로 맞추었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마포삼열은 이 청년을 향해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포 삼열은 이미 그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였다. 그는 마침내 마포삼열을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그가 바로 한국교회 초대 7인 목사중의 한 사람이며 제주도 개척 선교사가 된 이기풍목사이다.

이처럼 마포 삼열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하여 평양 개척 역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서 일어난 복음의 불씨는 점점 번져서 7명의 세례교인으로 시작하여 1949년에는 신도수가 7만여 명에 이르고 세례교인 수만해도 2만5천7백9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는 어떤 선교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라고 기록했다.

마포삼열은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1919년 3월 17일 일본의 아사히 신문의 기사 내용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외양으로는 그들(선교사들)이 사랑과 자비를 공헌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을 완전히 들추어 보면 술계와 탐욕으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복음전도를 위하여 한국에 와있는 듯이 가장하고 있으나 정치적인 혼란을 은밀히 충동하고 있다. …그 무리의 괴수는 마포(마포삼열)라는 미국 선교사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 복종하듯이 마포의 말을 잘 듣는다. 이곳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봉기의 중심지이다. 그곳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다" ―'평양 서문밖의 죄악촌'중 [朝日新聞] 1919년 3월 17일자]

이를 통해 3·1운동 당시 마포 삼열이 지닌 한국인에 대한 공감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잘 알 수 있다. 마포삼열은 한국인들을 자기 민족처럼 사랑했다.

그는 한국인들과 가까워지고자 한국 고유의 예법을 익히고 한국 음식을 즐겨먹었다. 그는 어디가든지 한국인처럼 침밀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그를 한국사람들은 "마포 목사님"이라고 부르기며 아버지처럼 섬겼다. 어느 한국인보다도 한국사람들과 한국을 더 사랑한 마포삼열목사는 196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과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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