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절리

[ 산방일기 ] 장돈식의 산방일기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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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4월 12일(화) 00:00
장돈식

지난겨울 제주에 머물면서 중문에 있는 주상절리를 보았다. 바다에서 수 십 미터나 솟은 6각형 돌기둥이다. 오래 전(3천5백만년),천지개벽 때 현무암(玄武巖)이 6각형 결정체(結晶體)를 이룬 것이라고 한다. 제주의 이것을 보며 해방 전 동해, 해금강에서 본 총석정(叢石亭)을 연상했다. 나는 경원선을 따라서 육로로 갔었기에 외금강(外金剛), 내금강(內金剛)을 두루 거쳐 해금강(海金剛)에 이르렀다. 지금은 이북인 통천군 고저읍에서 이남인 강원도 고성읍 북녘까지를 일컫는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금강의 절경에 심취(心醉)하여 한 여름을 거기서 보냈다. 조선조 철종때 시인 정지원은 서울 사람으로 부인이 산기(産氣)가 있어 출산을 돕는 다는 약, 불수산(不手産)을 지으려고 약국으로 가다가 마침 금강산 구경을 떠나는 친구들과 만나 엉겁결에 따라 나섰다. 좋다는 구석구석을 관람하면서 이곳 해금강 지역인 천성(千城)에 있는 유점사에 이르렀다. 그때 대웅전의 천수불(千手佛)을 보고서야 집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돌아와 보니 그 날이 바로 그 아기의 돌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나도 그 짝이었다. 봄 4 월초에 가서 가을 8월말에야 돌아 왔으니.

고저에서 거룻배를 타고 기슭을 더듬어 남녘으로 저으면 뭍으로 이어진 백사청송(白砂靑松)을 바라 볼 수 있다. 흰 모래에는 양분이 별로 없는지 백년생도 더 된다는 소나무들이 그리 늡늡하지 않으나, 그래서 오히려 보기에 좋다. 해변에 거뭇거뭇한 바위돌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총석정(叢石亭)이다. 검고 곧은 정육각형의 늘씬한 돌기둥, 수 백 수 천 개를 묶어 직각으로 세워서 만든 산이 바다에 이르러 절벽으로 끝난 곳이다. 그 바위가 현무(玄武)인데 배 미터는 넘는 높이로 둘러 세운 병풍 같이 서 있기도 하고, 바다에서 솟아올라 홀로 서 있는 것도 있다.

몇 개를 서로 묶어서 세운 것처럼 된 것도 있다. 많이 묶어 육지와 이어 닿은 곳에 그 위에 정자(亭子)를 지어 놓은 것이 총석종이다. 총석이란 이름은 돌을 묶었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던 마지막 날은 많은 시간을 여기서 보냈을 것이다"라고도 했다. 거기에 사람의 솜씨가 조화를 이룬 걸작이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 돌기둥 정상은 푸르고 고운 융단을 펼쳐 놓은 것처럼 잔디와 이끼가 깔렸다. 거기에 점철된 소나무가 의연히 해풍을 맞고 있다. 앞은 망망한 동해가 일으키는 푸른 파도의 끝머리가 하얗게 패며 밀려와서는 현무암 절벽을 때려 물보라를 일으키고는 물러서고, 다시 밀고 가서는 때리기를 수 만년 되풀이 한다.

이 총석정 근처의 바다 기슭은 매우 급경사이며 수심이 깊다. 밑에 유리를 붙여 만든 나무상자로 뱃사람들은 바다 밑을 살핀다. 그 해경(海鏡)으로 바다 밑을 들여다보면 50미터 이상의 깊이의 모래바닥에 새우가 헤엄치는 것이 보인다. 맑은 물 속을 솟은 바위 근처에서 알록달록한, 그지없이 아름다운 모양의 수없이 많은 물고기가 해초(海草) 사이를 헤엄쳐 오가는 영상(映像)은 형언키 어렵다. 그 많은 물고기중에 꺽저기란 놈은 습성이 괴상하다. 물 속에 알을 낳으면 다른 고기가 먹어버리는 것을 피해서 바위기둥과 기둥 모서리를 기어올라 수면 위를 사람의 키로 한 길 쯤 되는 곳에 알을 낳아 붙인다. 대기에 노출됐어도 철석이는 파도가 수시로 올라와 적셔주기 때문에 마르지 않는다. 때가 되면 알이 부회되어 어린 고기는 물 속으로 내려간다. 어부들은 고기가 부화되기 전에 이 알을 뜯어다가 간장에 졸여두고 밥반찬을 한다. 산에서 나는 산초의 열매만큼씩이나 큰 알맹이가 이 사이에서 '딱딱' 소리를 내며 터지며 맛이 괜찮다.

먼저 쓴 대로 오랜 세월 파도에 침식되면 바다 가운데 서있던 돌기둥이 쓰러지기도 한다. 그때 먼저 쓰러진 돌들이 밑에서 받쳐 주기 때문에 나중 것은 아주 넘어지지 않고 비스듬히 공중으로 뻗힌다. 그 굵기가 지름 1~2미터요, 길이가 물 위20~30미터까지 다양하다. 이상한 것은 하나같이 바다 건너 일본방향을 조준하고 있는 대포(大砲)다. 일제에 억눌려 지내던 젊은 가슴에 너무나 강렬한 인상으로 새겨져 있다. 지금도 그 조준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여말(麗末)의 시인 이곡(李穀)은 "왜 좋은 경치가 이토록 한데로 모여 있어야 하는가. 읊을 시어(詩語)가 다하여 종이를 비워 두고 엉엉 통곡 한다"하였다. 근래에 세정(世情)이 어수선하니 혹, 금기가 풀려 생전에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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