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한국떠날 때 이미 돌아가신 것"

[ 교계 ] 마포삼열목사 4남 헤이워드 마펫박사 증언

김훈 기자 hkim@kidokongbo.com
2005년 04월 12일(화) 00:00
   
헤이워드 마펫박사를 인터뷰하는 김훈국장, 옆은 서정운목사.

"마포삼열 선교사는 1864년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한 그는 하노버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화학을 전공,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선교의 비번을 안고 다시 매코믹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889년 4월 15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돼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 마포강변에 첫 발을 내딛었다.

처음 6개월간은 한국어 공부를 하였고, 언더우드로부터 경신학교의 전신인 예수교학당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투신하였다. 1893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곳곳에 교회를 개척 설립했다.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자택에서 방기창 김종섭 두 학생으로 신학교육을 시작한 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효시가 되었으며, 1904년 제1대 교장으로 취임해 1924년까지 20년간 시무했다. 그는 한국인을 각별히 사랑하여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믿음으로 저항했다.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의 한국교회를 선도하였다. 그는 병을 얻어 요양을 위해 귀국하였다가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별세했다".

이것이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마포삼열목사에 대한 삶의 기록이다. 그러나 본보의 확인 결과 마포삼열목사는 지병 요양차 귀국했던 것이 아니라 일제의 암살 음모를 간파하고 일시 피신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일제의 강압 통치가 더욱 거세지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다가 결국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LA의 미주장로회신학대학 서정운학장(전 장신대 총장)의 주선으로 마포삼열목사의 4남 헤이워드 마펫박사(88세)를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한 기자는 그로부터 한국교회사에 기록되지 않은 그의 부친 마포삼열목사의 일화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헤이워드 마펫박사와의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김 훈 국장: 와병중이심에도 불구하고 취재를 허락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린다. 미국에 와서 마포삼열목사에 대해 그간 한국교회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얘기를 들었다.

헤이워드 마펫: 건강이 좋지 못하다. 폐에 염증이 생겨 거동을 전혀 못하고 있다. 서정운목사께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했는데 멀리 한국에서 찾아오셨다니 어찌 그냥 돌려보낼 수 있겠나.
아버지 마포삼열목사는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1936년 가을 급히 귀국선을 탔다. 나는 그때 00에 있었는데 태평양을 건너는 기선안에서 아버지가 보낸 전보를 받고 깜짝 놀랐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신 후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와 막내 동생 톰을 평양에 그대로 두고 혼자 급히 귀국선을 탈 수밖에 없었던 경위를 그때 처음 들었다. 아버지는 당시 신사참배를 종교행위가 아닌 애국행위로 호도하며 강요하던 조선총독부에 맞서 신사참배는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므로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복종해서는 안된다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 섰다. 당시 평양에서 선교 사역을 하던 선교사들 중에 가장 지도급 위치에 있던 탓에 아버지의 신사참배 반대 주장이 선교부를 비롯한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 훈: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마포삼열목사의 계획에 없던 귀국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인가?

마펫: 아버지는 그 당시 조선총독부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아버지가 워낙 강경하게 신사참배를 반대한터라 당시 27명의 목사중 한 두 명을 제외한 모두가 신사참배에 대해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런 와중에 총독부내에 근무하는 일본인 관리의 부인으로부터 부친에 대한 살해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됐다. 그 부인은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사람을 보내 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단체(Black Dragon Society)의 암살 기도를 알리고 급히 본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했다. 아버지는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선교부 사람들 모두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급히 피신할 것을 권고하는 바람에 아무 준비도 없이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귀국하게 됐다. 이 길이 영영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마지막 길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김 훈: 당시 평양에 남아있던 부인과 막내아들 톰 마펫은 어떻게 됐나?

마펫: 당시의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고, 일본 경찰의 눈에 띄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잠시 지방으로 출타하듯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떠나야 했다고 들었다. 그 일본 관리 부인은 환송회나 일체의 모임을 갖지 말고 무조건 기차를 타고 떠나라고 했다고 한다. 떠나는 시간도 검문을 피하기 위해 행인들이 가장 붐비는 점심 시간에 기차를 타고 떠나야 했다. 아버지가 한국을 떠난후 일본 경찰이 매일 자택에 들이닥쳐 집안을 수색하고 꼬투리를 잡기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소식도 후에 들었다. 아버지가 떠난 후 어머니가 어린 막내를 데리고 모진 곤욕을 겪어야 했다.

김 훈: 마포삼열목사가 귀국한 1936년부터 1939년 별세하기까지 어떻게 생활했는지...

마펫: 아버지는 몸만 미국에 있었지 마음은 언제나 한국에 가 있었다. 아들의 입장에서 그런 아버지를 볼 때 아버지는 1939년에 돌아가신 게 아니라 1936년 한국을 떠나올 때 이미 돌아가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모든 인생과 사역이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한국에 돌아갈 날만을 고대했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일제의 강압정치가 더욱 심해지면서 돌아가기가 점점 어려워지자 매우 낙담하시고 괴로워하셨다. 그러던 와중에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었고 어머니가 귀국한 후 요양차 외가에서 가까운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지내시다 끝내 세상을 떠나셨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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