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연두 빛 시곡

[ 음악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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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4월 05일(화) 00:00

유혜자

파리에 있는 몽쇼 공원에는 모네(Monet, Claude 1840-1926)의 화집에서 본 대로 연두 빛 나무잎새들이 팔락거리고 있었다. 키 큰 나무들의 층층이 우거진 이파리들이 땅에 점점으로 드리운 그림자. 모네의 그림에서처럼 그늘에 걸터앉은 귀부인들은 없었지만 둘레의 아늑한 정취가 인상적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새까만 고목둥치에 피어난 연초록 새 이파리가 눈물겨워 보였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딱딱해졌던 둥치에 누가 살짝 면도날이라도 들이대 준 것처럼 뚫고 나온 그 신비한 힘을 생각하노라니 눈부신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쏘아대었다. 나무에 앉았던 새들도 눈이 부셔서인지 줄지어 날아갔다.

내가 지나온 길엔 연초록 순간의 환희도 있었고 놓치고 싶지 않던 순간과 절망의 시간도 많았으리라. 조락과 새싹, 끈질긴 나무의 수고로움을 통하여 기다림의 고통과 사랑의 힘이 순환되고 있음을 절감하며 서 있었을 때 새 이파리들의 숨소리라도 들려올 만큼 고즈넉했다.

프랑스의 작곡가 쇼송(Chausson, Ernest 1855-1899)의 우아한 '시곡(詩曲)'의 느리고 신비로운 서주가 생각날 만큼 여유로웠다. 시곡은 오케스트라 반주를 곁들인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시심을 엮은 서정적 선율이 아름답다. 몽쇼 공원에 일던 바람소리에 작곡가나 옛 사람들도 어떤 시심(詩心)이 솟아났을 법한 분위기였다. 그들의 소리 없는 감격이 새 이파리 피어나듯 오늘의 우리 마음에도 전해졌을까. 바람에 나부끼는 잎새들이 파리 음악인들의 열정과 사랑을 되살려 낼 것인가.

몇 년 전 몽쇼 공원에서 생각난 시곡의 작곡자인 쇼송은 법률을 전공해서 법학사가 된 후 뒤늦게 파리음악원에 입학했었다. 그러나 곧 학교를 자퇴하고 프랑크(Franck, Cesar 1822-1890)의 제자가 된다. 프랑크는 법률공부를 그만 둔 쇼송에게서 작곡가가 될 가능성을 발견하고 작곡에 대한 지도는 철저히 하지 않았으나 좋은 작곡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준다. 쇼송은 스승의 말에 봄날 새순처럼 돋아난 희망을 안고 노력해서 스승처럼 뒤늦게 빛을 보게 된다.

64세에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로 크게 인정받은 프랑크, 쇼송은 41세에 시곡 발표로 각광을 받았으니 대기만성형이었다. 게다가 그 기질도 닮았었다. 다소 우수를 띤 기품 있는 서정과 섬세한 감수성도 닮았고 현실과는 잘 타협하지 않고 자기들의 음악상의 꿈을 추구했다. 악보출판과 판매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내면적 미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는 국민음악협회의 설립에 노력하고 간사가 되어 활동한 이외에는 프랑크의 따뜻한 공감과 이해에 쌓여 시정이 물씬한 음악들을 만들었다. 몽쇼 공원에서 나무에 새롭게 돋아난 연두 빛 잎새를 보고 쇼송의 시곡이 생각났고 사람은 희망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삶을 꽃피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떠올라 다시금 시곡을 꺼내어 들어본다. 음악가로서 새로움과 창조적인 것을 추구하게 만든 것은 희망이 실어준 동력이었으리라.

창작곡은 상상의 산물이라고 해도 몽쇼 공원의 푸르름 같은 것에 취해보지 않고는 이처럼 세련되고 우아한 감성을 표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명상적이고 맑은 주제를 표출해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열정과 오묘한 고통을 가라앉혀야 했을까. 이 명상적인 제1주제는 제2주제와 어울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조바꿈을 하면서 인간적인 따스함을 살려내는 듯하게 발전된다. 다시 온건하고 아름다운 피날레를 향하여 조용하게 미끄러지는 부분을 듣다가 그의 슬픈 최후가 생각나 추연해 진다.

쇼송은 시곡의 좋은 반응을 얻은 3년 후 44살 때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리메라는 시골마을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며 타오르는 황혼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미끄러져서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오늘따라 슬프고 아린 몽쇼 공원의 연두 빛 잎새가 파들파들 떨릴 것처럼 생각된다. 황홀한 노을에 잠겨 영원의 길로 들어선 슬픈 시구 같은 작곡가의 애잔한 숨소리도 들려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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