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기 위해

[ 음악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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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3월 24일(목) 00:00

유혜자/ 82회

3월의 나무들은 뜻밖의 폭설이나 봄 안개 속에서도 새순을 준비하지만, 세월의 덧없음에 익숙한 이들은 눈 깜짝할 새 흘러가 버리는 3월과의 이별을 준비한다. 깊은 땅속에서는 훈기로 얼어 있던 땅이 녹아 술렁일텐데 땅위에는 겨울의 끝자락이 쳐져 있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몇 년 전부터 이맘때쯤이면 바흐(Bach, Johann Sebastian 1685-1750)의 '마태수난곡'을 플레이어에 건다.

수난곡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4복음서 중 하나를 택해서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그 전후 사건을 내용으로 한 관현악과 합창인데 부활절 1주전에 예배에서 사용된다. 바흐는 다섯 개의 수난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현재는 마태 요한 두 곡만 전해오는데, 요한 수난곡이 극적인데 비해 마태수난곡은 서정적이다. 마태수난곡 가사는 마태복음 26장 1절에서 27장의 66절까지를 이용해서 모두 78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10년 전 명반인 칼 리히터(Richter, Karl)지휘의 '마태수난곡'을 구입했다. 목사의 아들로 일생을 바흐의 음악재현에 헌신한 칼 리히터의 지휘여서 반갑게 사왔다. 그러나 땀과 피로 얼룩진 예수가 거대한 십자가를 끌고 가고 사나이들이 야유하는 자켓 그림과 세 장 짜리의 두툼한 부피가 고난의 무게를 생각나게 해서 선뜻 들어보게 되지 않았다. 다른 수난곡보다 사랑스러운 예수의 모습을 느끼게 하고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투명하게 묘사한 서정미가 있다고 알려졌는데도 세 시간이 넘는 곡이어서 들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죄 없이 수난 당한 예수의 고통에 얼마나 고뇌하며 동참할 것인가 내심 겁이 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렸을 때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여호와가 예정한 것이어서 우리가 느끼는 육신의 고통과는 다른 차원으로 여겼다. 그런 철없던 시절을 보내고 성경에서 예수가 잡히기 전 세 번씩이나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는 장면을 읽고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기도 했다.

세찬 바람이 몰아치다가 비가 쏟아지던 몇 년 전 초봄이었다. 영화 '왕중왕'에서 예수를 판 가롯 유다가 후회하여 자살하던 장면이 떠올라 나는 부랴부랴 마태수난곡을 플레이어에 걸었다.

웅장하고 서정적인 서주가 2분 동안 계속되더니 "주여, 이 땅의 영예로운 통치자여 당신의 수난에 의해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어느 때에도 최적의 시기에도 찬미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시옵소서굨" 성스러운 첫 번째 합창에 머리가 맑아짐과 동시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테너, 베이스, 소프라노, 앨토의 성인들과 청아한 어린이들의 순박한 합창이 마음을 순화시켜주었다. 수난곡의 처음과 끝에는 으레 성경구절 이외의 합창을 넣는 관례가 있는데 이 합창이 마태 수난곡에 가졌던 무거운 선입견을 떨어버리게 했다. 이 음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전반부는 최후의 만찬에 임한 예수의 고뇌와 잡히심, 그리고 제자들이 도망가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예수의 재판과 죽음, 매장이 담겨 있다. 예수가 사흘만에 부활하심까지는 다루지 않았다.

우리는 예수가 돌로 가려진 어둡고 차가운 무덤에서 새 생명을 얻고 부활하셨음을 익히 알고 있다. 어둡고 칙칙한 땅 밑에서 보이지 않게 새싹을 준비하고, 죽은 듯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움을 틔우며 다시 봄을 준비하는 3월의 의미처럼.

이런 의미를 생각하며 성스럽고 그윽한 화음을 듣는다. 격정적이지 않고 아름다운 서정이 계속되어서 시간이 언제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들을 수 있다.

겨우내 기다리던 3월이 오래 머물지 않은 것을 아쉬워한다. 봄이 다시 태어나도록 어둠에서 보이지 않게 작업을 계속한 것처럼 우리 앞엔 보이지 않는 아픔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자들이 '마태수난곡'이 "마태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고 극찬한 것을 되새기며 부활 후 승천하신 예수가 늘 우리 곁에 머물고 계심에 위안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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