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십자바위

[ 믿음으로떠나는여행 ] 주기철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서<3>

이수진 기자 sjlee@kidokongbo.com
2005년 03월 15일(화) 00:00

믿음으로 떠나는 여행 (10)

지금도 주기철 목사가 자라난 웅천교회는 사실 순교자들에게는 큰 배움터이다. 주님은 그를 일사각오의 순교자로 만들기 위해 여러모로 단련시키셨음을 이 웅천 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가진 청년 주기철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그는 자포자기하지 않았다. 어린시절 주님의 기독교를 철저히 믿겠다고 결단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청년 주기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다시 시작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집사의 직분을 받아, 교사, 회계 등 여러 가지 일을 맡아 최선을 다했다. 뿐만 아니라 '교남학교'라는 야간학교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작은 갯마을일지라도 민족정신은 시대를 앞서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 마을 전체가 움직였다.

민족운동에 앞장 선 주기철이 목회자로서의 삶을 결단하게 된 것은 1920년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참석한 집회였지만, 김익두 목사의 설교는 청년 주기철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기로 서원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5년의 신학공부를 마친 주기철 목사는 부산 초량교회에 내려와 첫 목회를 시작한다.

그러나 주 목사의 목회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신앙의 정절이 분명한 그에게 신사참배는 우상숭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의 상황은 달랐다. 신사참배에 대한 압력이 강해지고 있었고, 신앙인의 마음은 그들의 강압에 흔들리고 있었다. 주기철 목사는 우선 목회자들의 마음을 붙잡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신사참배는 죄악"이라 외치며, 모든 목회자들이 확실히 신앙결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하여 당시 그가 소속돼 있었던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안을 가결토록 한다. 이 때부터 주목사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된다.

주기철목사의 철저한 신앙을 바라보면서, 실로 도전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작은 몸 어디에서 그 엄청난 담대함이 솟아날까? 이는 마산 문창교회 목회시절 금요일마다 기도하러 올라갔던 십자바위에 올라가면 그 궁금증이 풀린다.

무학산 자락에 위치한 십자바위는 힘써 올라가면 30여 분이면 도착한다. 산중턱에 위치한 이 바위는 그 가운데가 십자가 모양으로 갈라져 있다. 바위 너머는 바로 절벽이기 때문에 정신차리고 기도하지 않으면 자칫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는 곳이다. 주기철 목사는 매주 금요일이면 이곳에 올라와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에 대한 곧은 절개를 세웠다. 마치 절벽 위에 선 십자바위처럼 곧은 신앙으로 묵묵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 주기철 목사, 이 절개가 그를 순교자가 되게 했으리라.

웅천 땅을 떠나, 이 곳 마산 십자가바위에 올라서서 주기철목사의 순교자의 길을 생각해본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온 인생을 바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젊은 목회자의 불같은 충성이 오늘 순례자의 가슴을 태우고 또 태우고 있다.

박 귀 용 목사 / 누가성지교육원 ㆍ안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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