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몽골리아' 보다 관용 기억하고 계승해야

[ 크리스찬,세계를보다 ] (12) 울란바토르와 칭기즈칸

윤은주 박사
2024년 10월 21일(월) 10:41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Ulaanbaatar)는 350만 몽골 인구 중 160만 명이 모여 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도시이다. 제정러시아 백군을 격퇴한 인민군 원수 허를러깅 처이발상은 몽골의 스탈린이라고 불렸는데, 1924년 소련에 이어 두 번째로 사회주의 몽골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1923년 사망한 민족주의자이자 처이발상의 동료였던 담딘 수흐바타르를 기리는 뜻에서, 이전의 수도 이름 후레(울타리)를 '붉은 영웅' 러시아어 음차 울란바토르로 개칭했다. 수흐바타르는 1919년부터 진주해있던 중화민국군을 몰아내고 1921년 복드 칸을 복위시켰다. 그러나 1924년 복드 칸이 병사하자 군주제는 폐지되고 인민공화국으로 전환됐다.

해발 1,350미터에 위치한 울란바토르는 위도상으로 빈, 뮌헨, 시애틀과 같고 경도상으로는 충칭, 하노이, 자카르타와 유사하다.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으로 겨울은 춥고 건조한데, 최한기 평균 기온이 영하 21도로 세계에서 가장 추운 수도이다. 몽골은 유목국가로서 말, 소, 양, 염소, 낙타를 대표적 5축으로 꼽는데, 캐시미어 산양 털은 전 세계 생산의 48%를 차지하고 원모의 80%를 수출한다. 한반도의 7.4배 정도에 달하는 국토에 구리, 석탄, 철광석, 희토류 등 80여 종의 광물을 보유한 몽골은 세계 10위의 자원 부국이다. 인접국인 중국, 러시아와의 광물 교역이 주를 이루는데 일본, 호주에 이어 우리나라도 교역에 참여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영토보다 넓은 지역을 다스린 몽골제국은 유목민족 특성인 기마부대를 앞세워 아시아 동쪽 끝 한반도에서 유럽까지 단숨에 제패했다. 천호제를 바탕으로 그 밑에 다시 백호와 십호를 조밀하게 놓는 조직력은 정복 전쟁 승리의 기본 요소였다. '약탈경제'를 기반으로 했던 유목국가 초창기부터 약탈 규범을 정하고, 부족 모두에게 혜택이 가도록 관리 통제했던 리더십 역시 칭기즈칸의 업적이었다. 몽골에 복속하는 나라는 '국왕 친조, 질자 파견, 호적 제출, 역참 설치, 병력 파견, 물자 공출, 다루가치(파견관) 주재' 등의 의무를 다해야 했지만, 고유한 종교와 문화는 유지하도록 했다. 물론 거부하면 '싹쓸이 몰살 정복전'을 피할 수 없었다.

몽골제국은 1276년 쿠빌라이칸 당시 남송을 함락시키면서 최대 판도를 이뤘다. 몽골제국이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구축한 역참(驛站·공무를 위해 제공되는 마굿간과 여관)은 공물 전송과 통신을 위함이었는데, 역참 교역로가 생기면서 동서 대륙 간 교류가 활발해졌다. 원나라를 여행했던 마르코 폴로의 여행담이 전해지자 '대항해 시대'가 열리기도 했다. 몽골제국 치하에서 불교와 힌두교,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 거의 모든 종파가 공존한 점은 특징적이다. 칭기즈칸은 종교 황금기에 등장했는데, 종교의 배타성에서 비롯된 전쟁이 인류를 불행에 빠뜨리는 모순된 상황을 목도했고, 제국 내에서는 종교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관용 정책을 펼쳤다.

칭기즈칸의 종교 관용성은 18세기 미합중국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있다. 1691년 프랑스어로 된 칭기즈칸의 전기 소설 '징기스: 타타르의 역사'가 발간됐고 영어로 번역되어 전달됐다는 것이다. 몽골법에 "종교를 이유로 어떤 사람을 방해하거나 괴롭혀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있는데, 제퍼슨의 법률에도 "어떤 사람도...종교적 의견이나 신념 때문에 고통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있다. 몽골법의 영향력은 더 따져봐야겠지만, 종교적 명분에 기인한 전쟁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 유럽과 중동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세속의 권력투쟁 속에서 종교적 명분은 타락하기에 십상이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은 정복한 나라의 종교 지도자들을 놓고 그들의 행동이 자신들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판단하고 책임을 물었다고 한다. 자신을 타락한 종교 지도자를 향한 신의 채찍으로 여겼다 하기도 한다. 이는 칭기즈칸이 모든 종교에 있어서 도덕적인 가치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복속(服屬)국에는 10만 몽골군을 이끄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자신의 태생부터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친족 내 사투와 수많은 전장(戰場) 경험을 통해서 인생을 초월하는 종교적 가치나 인류 보편 가치를 추구하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칭기즈칸은 중국인과 무슬림 학자, 중국 오지의 수도자나 기독교 신부, 점성술사 등 현인들과의 종교적 대화를 일삼았다고 한다.

유목민족 치세의 역사가 새롭게 기록되고 있는 울란바토르. 1992년 새 헌법에 따라 몽골인민공화국에서 몽골공화국으로 바뀐 이후 새롭게 강조되고 있는 칭기즈칸. 2022년 10월에는 국제박물관 등급의 칭기즈칸 박물관이 개관했다. 박물관에는 최초의 유목국가를 창설한 흉노족 역사를 비롯해 37명의 몽골 칸 관련 전시품이 진열돼 있다. 몽골인들에게 칭기즈칸은 민족 자부심의 원천이다. 13~14세기 아시아와 유럽을 호령했던 몽골제국의 역사 속에서 칭기즈칸이 추구했던 종교에 대한 관용성이 집중 조명된다면 몽골군을 앞세운 '팍스몽골리아'의 기억보다,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 정신의 상징 '피스몽골리아'가 더욱 탐구되지 않을까 싶다.



윤은주 박사

(사)뉴코리아 대표·외교광장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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