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람데오의 시간

[ 목양칼럼 ]

이근형 목사
2024년 10월 09일(수) 08:26
교회 마당에 둘러서 있는 저 소나무는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을까. 계절에 따라 시끌벅적하게 피었다가 지는 꽃들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새벽에 어김없이 눈을 뜬다. 교회당에 가서 자리에 앉는다. 예배당은 오늘도 시끌벅적하지 않다. 분재 된 소나무같이 한 남자가 좌정하고 있을 뿐이다. 예배당 밖의 소나무들은 매일 새벽 고요만이 가득한 교회당을 드나드는 필자를 보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 어디에나 충만하게 존재하신다. '코람데오(Coram Deo)'라는 라틴어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의 신학 용어다. 필자가 목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이기에 언제나 코람데오의 시간 안에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아나톨 프랑스의 '성모 마리아의 곡예사'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곡예사 출신 베르나베가 수도사로 있는 성당에는 수도사들이 지식과 시와 노래, 그림의 재능으로 성모를 칭송하고 있었다. 성모를 사랑하되 헌신할 재능이 없어 고민하던 그는 평생 '아베마리아' 밖에 암송 못했던 수도사가 죽음의 순간에 그 입에서 장미꽃이 나와서 그의 성덕(聖德)이 증명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기쁨을 찾았다. 그 후 일과 시간마다 베르나베가 어디론가 사라지곤 하는 걸 수도사들이 알고 찾아간 작은 성당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베르나베가 성모상 앞에서 자신의 유일한 재주인 곡예를 열심히 펼치고 있는 게 아닌가. 수도사들이 그를 제지하기 위해 들어가려는 순간 성모상이 움직이더니 푸른 옷깃으로 베르나베의 땀방울을 씻어주는 것을 보게 되고 수도사들은 그 자리에서 주님을 찬양했다는 이야기이다.

언젠가 은퇴하게 되면 그 베르나베의 마음이 되어 재주를 바치며 노년을 살고 싶다. 어느 순간 그분 앞에 설 때 그분이 필자의 이마에 땀을 닦아주시기 바라며.

사물놀이 대가 김덕수 씨의 아들은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강원도의 어느 작은 마을 마당에서 하는 공연을 동네 어르신 몇 사람이 감상하는 광경을 보았다. 언제나 구름 관중 앞에서만 공연하는 대스타를 홀대한다는 불쾌감이 찾아오려던 순간, 마치 대군중 앞에서인 듯 한껏 흥에 젖어 땀을 뻘뻘 흘리며 열중하는 아버지를 보고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사람이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있는 힘을 다하여 몸을 흔들던 또 하나의 '김덕수'가 되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교육전도사 시절 중고등학생들에게 가르친 큐티를 새벽마다 하고 있다. 새삼스럽다. 그러나 달라진 시대상에 따라 새롭게 한다. 새벽에 홀로 일어나 큐티를 한 후 그 묵상의 요점을 적절한 사진에 합성한 디카시로 만들어 성도들의 단체대화방에 올린다. 성도들은 각자의 시간과 자리에서 단체대화방에 올라온 디카시로 기도한다. 이렇게 나의 새벽은 성도들과 함께 매일의 번제(燔祭)로 올려진다.

조선 시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시조가 떠오른다. "이 몸이 죽어 가셔 무어시 될고 하니/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야 이셔/백설이 만건곤 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서슬 퍼런 정치 상황에도 자신은 영월 봉래산의 낙락장송처럼 목숨 다하여 절개를 지키리라는 결기이다. 봉래산 낙락장송이 아니라 교회 마당을 지키는 소나무처럼이라도 '독야청청(獨也靑靑)'의 예배자로 살아가리라. 예수님 자신이 고독한 기도의 자리를 찾지 않으셨던가.

오늘도 새벽이 외롭다. 소나무도 말없이 예배당 계단을 오르내리는 구부정한 한 남자를 지켜보고 있다. 저 소나무는 무어라 말하고 싶을까. 고요한 번제(燔祭)를 마치고 아침 식사하러 가는 시간, 이 발걸음도 코람데오의 순간이다. 소나무가 뭐라 한들 무슨 상관이랴.



이근형 목사 / 포도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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