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과 등나무로 발을 묶어 놓을 땐가

[ 논설위원칼럼 ]

김권수 목사
2024년 09월 30일(월) 13:37
인류문명의 발자취는 갈등의 역사이다. 죄성을 가진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고 배우면서 지식과 기술도 세기를 더해간다. 그러면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고방식과 철학 그리고 가치관도 다양해진다. 추구하려는 사람이나 그 무엇이 없다면 갈등은 없겠지만, 누군가가 추구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추구하려고 열심을 낼수록 갈등은 심화된다.

주지하는 '갈등'의 한자어는 이를 잘 대변한다. 덩굴식물은 종류마다 정해진 방향으로 줄기를 감는데 칡은 왼쪽으로 덩굴을 감으며 올라가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덩굴을 감아올라 간다. 방향이 다른 둘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서로 뒤엉켜 있게 된다. 이것이 갈등의 어원이다. 갈등은 칡과 등나무처럼 개인 혹은 집단 사이에서 이해관계로 인해 충돌하거나 마찰하는 그 무엇이다. 레리와 윌리암이 '교회의 갈등과 관련된 사역'에서 힌트를 준 것처럼, 두 명 이상이 동시에 가질 수 없는 유한한 그 무엇을 소유하려는 시도가 역동적일수록 갈등은 다양성 때문에 더욱 많아진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섭리는 개인이건 공동체이건 '하모니'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구약의 인간론은 영혼과 몸을 구분하는 것을 지양하고, 삼라만상의 창조도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갈등하는 모양새는 화목제물이 되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따라서 주님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당연히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면 우리 모두는 지체가 된다. 지체의식이야말로 갈등 해결의 지름길이다. 손과 발과 두뇌가 자신의 고유기능만 주장하고 따로 간다면 어떤 해프닝이 벌어질까? 갈등할 수 없어야 고린도전서 12장 중반부에서만 '지체'라는 단어를 16번 언급하시는 예수님의 건강한 지체이다.

갈등하는 것은 크건 작건 병들었기 때문이다. 갈등으로 인해 병들어가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궤변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 갈등을 의도적으로 조장하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그것은 사탄적이다. 만일 교회지도자가 영향력에 혈안이 되어 그리한다면 갈등이론을 아는 초신자(지체)는 기겁을 하고 교회를 떠날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주안에서 서로 인정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자족하면 갈등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간다. 그런 측면에서 절대주권자의 인도하심에 순응하는 것이 갈등을 없애는 비결일뿐더러 각자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걸맞은 열매가 시절을 좇아 맺히는 현실을 만나는 좁은 길이다. 칡나무와 등나무가 갈등을 지양하고 서로를 인정하면 존재감이 나타난다. 칡은 한방에서 꽃은 '갈화', 뿌리는 '갈근'이라는 약재로 쓰이고, 줄기는 밧줄이나 옷감(갈포)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등나무는 조경수로 사용되며, 새순은 등채, 꽃은 등화채로 삶아서 먹기도 하며, 또한 잎은 염료로, 줄기는 바구니, 의자 등 가구를 만드는 소재로 쓰인다. 이처럼 칡과 등나무는 각자의 자리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식물이다. 그러나 서로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때 각자의 장점과 특징이 서로 얽히면서 창조주의 섭리를 무시하는 죄악을 더 간교하게 범한다.

지금은 총회 비전을 갖고 나아갈 때이기에 갈등으로 발을 묶어 놓을 때는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건강한 지체라면 절대불변의 진리와 관련된 갈등은 타협하지 않고, 성경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갈등이라면 서로 인정하며, 비본질적인 갈등이라면 상식대로 대세를 따라가려는 양심적인 언행이 나타나야 정상이다. 지금은 갈등의 원인과 내용이 무엇이고 어떤 상황이건, 쇠퇴하고 있다는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져 가는 것을 지향할 때이다.

김권수 목사 / 동신교회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