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의 상처 기억하며 공생 모색해야

[ 크리스찬,세계를보다 ] (10) 디아스포라 코리안-고려인

윤은주 박사
2024년 09월 20일(금) 10:36
1890년대부터 조선을 떠나 제정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연해주) 지역에 정착한 한인들은 불모지를 개척하며 농업에 있어서 성과를 올렸다. 구한말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되자 독립운동을 위한 이주민이 뒤따랐다.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에 종사하며 부를 축적하는 한인도 생겨났다. 기근으로 인해 먹거리를 찾아서 이주하거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한인들은 특유의 근면 성실한 기질을 발휘하며 연해주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강의 힘이 맞부딪히는 국제질서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전한 거주는 보장되지 못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소련 당국은 곧바로 연해주 한인 17만 2천여 명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을 세우며 대륙을 향해 세력을 뻗쳤는데, 1905년 러일전쟁 패배의 경험 때문인지, 일제 식민지에 속했던 한인이 간첩 활동에 연계될 수 있다는 우려로 조급하게 강제 이주 결정이 내려졌다.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떠나야 했던 많은 한인은 낯선 혹한의 동토에서 질병과 아사, 동사 등으로 희생됐다. 일제 강점에 이은 또 다른 민족 비애가 아닐 수 없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을 비롯, 중앙아시아 '스탄' 국가들과 러시아 남부에 흩어져 사는 한인 후손을 일컬어 '카레이스키(고려인)'라고 불렀다. 이전까지는 강제 이주 정책이 알려지지 않았고 문제시되지도 못했다. 현재 고려인은 대략 50만 명가량으로 추정된다. 우즈베키스탄에 19만 8천여 명,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 10만 명 이상 거주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3년부터 고려인 동포 지원을 본격 법제화했다. 현재 대표적으로 안산과 인천광역시, 광주광역시에 1만 명 이상의 고려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스탈린 시기 강제 이주 정책 이후 수십 년간 고려인은 한글을 사용하거나 교육하지 못했다. 연해주에서 쌓았던 기반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흩어져 다시금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내몰렸다. 이는 고려인 3, 4세가 모국어나 문화를 잇지 못한 배경이기도 하다. 1991년 구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 속에서 고려인은 새로운 위기에 처하게 된다.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이슬람 문화 부활과 러시아어가 아닌 각국 고유 언어 사용이 새로운 난제가 된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에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와 이슬람의 중심지였던 부하라, 수도 타슈켄트 등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가 자리하고 있다. 타슈켄트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 민스크와 함께 구소련의 5대 도시였다. 1966년 대지진을 겪은 후 도시 전체를 재건해서 사회주의국가의 위용을 선전하기도 했는데 중앙아시아의 거점 역할을 했다. 우즈베키스탄은 독립 이후 우즈베키스탄어를 공용화하고 꾸준하게 민족문화를 복원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취업이나 유학차 들어 온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이 많다. 2023년 현재 4만 3320명으로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이다. 인구수 3800만에 1인당 GDP가 2200달러에서 4400달러로 급증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중심 국가로서, 우리와의 교류 협력이 여러모로 늘고 있다. 타슈켄트1 세종학당에서는 한 학기 450명의 학생이 교육받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는 8개의 세종학당과 교육부 소속 타슈켄트한국교육원 세종학당이 있다. 고려인 이외에도 한국 유학을 꿈꾸는 우즈베키스탄인이 몰리면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최근에는 KT가 타슈켄트에 데이터 센터를 설립하고 광케이블 사업을 본격화할 참이다.

조선말 기근과 구한말 일제의 폭거를 피해 연해주행을 택한 고려인. 그러나 척박한 땅을 일구며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련 당국에 의해 중앙아시아 더 깊숙한 곳까지 진출하게 된 고려인. 세월이 흘러 중앙아시아 각국으로부터 이들의 후손이 취업과 학업을 위해 한글을 배우고 한국행을 택하고 있다. 때마침 세계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한류' 영향으로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은 날로 증가하는 추세다. 물론 한국의 경제 성장이 밑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산업화에 이은 민주화 성공담도 빼놓을 수 없다.

국내 거주 고려인이 한국 사회가 앞서 경험한 발전 경로의 명암을 학습하고 돌아간다면, 중앙아시아는 물론 러시아 전역에서 선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피폐한 자본주의 대신 산업화와 함께 인권과 민주주의가 성숙해지고 그 결과 상생의 문화가 무르익는다면 어떨까. 우리나라는 세계 속의 매력 중심 국가로서 더욱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게 될 것이다. 국권 상실과 함께 식민지로 전락한 지 114년, 민족상잔의 전쟁이 승패 없이 멈춰선 지 71년, 국제체제의 전변(轉變)을 경험한 지 35년. 우리는 또다시 국제 패권 질서 변화 앞에 놓여 있다. 힘에 쫓겨, 힘없이 흩어졌던 고려인 역사를 기억하며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 평화롭게 공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 시절이다.



윤은주 박사

(사)뉴코리아 대표·외교광장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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