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탄압에도 전국적 차원의 국내외 선교 협력

[ 선교여성과교회 ] 경남지역 여전도회 15

탁지일 교수
2024년 07월 11일(목) 02:38
1934년 2월 22일 오후 7시에 통영 대화정예배당에서 경남부인전도회 제16회 총회가 열린다. 임원에는 회장 방덕수, 부회장 이옥경, 서기 주영옥, 부서기 조현우, 회계 문복숙, 부회계 권순이, 그리고 총회 총대로는 양한나와 이옥경이 피선된다.

조선연합여전도회 총회 총대인 방덕수는 50원 이상의 총회 부담금을 납부하는 지회에 한해서만 총대 일인을 파송하기로 했다고 보고한다. 또한 한상동을 삼랑진 지역에서 전도하도록 한다.

특히 이날 총회에서, 경북노회, 경안노회, 경남노회 등 3개 노회가 연합해 일본 나고야에 강성숙 전도사를 파송하여 3년 동안 전도하도록 했다고 문복숙이 보고한다. 대구 신정예배당에서 개최된 연합회에는 경안 노회 총대 1명, 경남노회 총대 2명, 경북노회 총대 6명 등 총 9명이 모였는데, 이는 조선연합여전도회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의 여전도회연합회도 국내 외 선교를 그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31년 제13회 총회록에 따르면, 3개 노회 여전도회는 연합전도사업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연합여전도회는 김순호의 중국 산동성 파송 이후, 1933년 윤정희 선교사 남만주 파송, 1934년 한가자 선교사 남만주 파송, 1937년 유안심 선교사 북만주 파송 등 중국 선교를 지속했으며, 또한 강성숙의 일본 파송 이후, 경남부인전도회가 설립한 수영, 개평, 고간, 학동, 진교리, 삼랑진 교회를 중심으로 국내외 선교를 계속한다.

# 일제 탄압과 사업 중단

1930년대에 이르러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어 가는 시기에, 전국의 여전도회 활동은 체계화되기에 이른다. 194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연합대회가 발간한 '전도회순서'에 따르면, 아래와 같이 전국 여전도회가 따를 수 있는 순서 모범(본보기)이 작성되어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932년에 발송된 '각 여전도지방회와 지회전'에 따르면, 전국적 차원의 국내외선교를 위한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남여전도회총회록은 제1권(1918년 제1회~1929년 제11회)과 제2권(1930년 제12회~1934년 제17회)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총회록은 1934년 12월 3일 오후 2시에 마산 문창예배당에서 '우리 인도자 예수'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17회 총회까지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후의 총회록들이 자료로 남아있어, 일제강점기 후반부에도 여전도회의 활동이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조선 침탈은 거세지고, 조선교회는 강력한 출애굽의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삼일운동의 좌절과 1920년대 사회운동의 활성화로 인한 교회의 침체기를 벗어날 틈도 없이, 조선교회는 다시 고난을 겪기 시작한다.

1930년대 조선교회는 조직적으로 통제되었다. 교회 설립과 복음 전도를 위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필요로 했다. 조선교회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강요받았고, 이름과 글도 강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경남부인전도회의 형편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1934년 경남부인전도회 제17회 총회의 주제인 '우리 인도자 예수' 그리고 주제 성경 구절인 시편 23편 1~4절은,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조선교회와 경남부인전도회의 심경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 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 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1934년 현재 경남부인전도회에는 총 51개 지회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경남여전도회총회록은 제17회 총회록까지 합본돼 있다. 이후 태평양전쟁(1941~1945년)과 함께 조선교회의 고난은 그 깊이를 더하게 되고, 경남부인전도회도 어두운 역사의 안개 속에서 그 활동이 약화된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시기에도 전국연합회의 활동도 이어지고 있었던 것처럼, 그 이후에도 경남여전도회의 활동이 지속되었음을 다음의 경남여전도회장 방덕수가 각 지회로 발송한 안내문 및 '경남여전도회제18회총회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연합대회 제11회 순서'에 따르면, 전국연합회뿐만 아니라, 경남지방회를 비롯한 국내외 연합회에서 총대들을 파송해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남지방회에서는 동래읍여자실수학교 이삼란이 총대로 참석했다.

탁지일 교수 /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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