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인 디아스포라, 독립운동의 요람"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22회 학술발표회

김동현 기자 kdhyeon@pckworld.com
2024년 03월 03일(일) 22:08
한국기독교학회가 지난 2일 온라인으로 제422회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사진은 지난해 열린 제416회 학술발표회의 모습. /사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중반까지 중국으로 이주한 '초기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민족독립운동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이재근)는 지난 2일 온라인에서 제422회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이날 '초기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의 특징'을 주제로 발표한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는 서간도, 북간도 및 중국 본토의 한인 디아스포라교회의 역사를 분석하고, 민족독립운동의 관련성에 대해 설명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간도로 이주한 한인들은 △경제난 △독립운동기지 건설 △신앙의 자유와 이상촌 건립 등을 목적으로 고향을 떠났다. 이들은 간도 등지에 정착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1899년 김약연 문병규 김하규 등이 세운 '명동촌'과, 1906년 이상설 등이 자리를 잡은 '용정촌'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명동교회, 용정교회 등 각 지역에 교회를 세웠으며 민족교육을 위한 학교를 건립했다. 오늘날 민족독립운동의 요람으로 평가받는 서전서숙, 명동학교 등이 이 당시 세워진 학교들이다. 정 교수는 신앙적 동기로 이주해 기독교 촌락을 건설한 경우는 1906년부터 발견되며 간도노회록에 따르면 북간도 지역에만 50개처 이상 존재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이주 초기에는 배일(排日)사상을 가진 한인들을 현지에서 반기는 분위기였지만, 만주사변 이후 한인들이 일제의 중국 침략의 주구로 인식되면서 많은 공격을 받았다. 경제적 여건 역시 좋지 않아 생활이 곤란했고 질병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더불어 독립군의 근거지로 일제의 주목을 받으며 경신참변 등 시시때때로 들이닥치는 일제의 만행은 이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했다.

하지만 한인 디아스포라들은 이를 이겨내고 다시 부흥했다. 특히 북간도 지역의 성장이 두드러졌는데 이들은 1938년 당시 1345명의 교인 증가가 있었고, 1940년에는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원을 신설하기도 했다. 정 교수는 이들이 "디아스포라로서 조국 독립과 귀향을 꿈꾸면서도 정착한 곳에서 번성하고 그곳을 위해 기도하라는 '예레미야의 편지(렘29:5~7)'의 뜻을 품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정 교수는 상해와 남경, 북경 등 중국 본토로 이주한 한인 디아스포라들 역시 신한청년당, 상해 임시정부, 북경고려기독청년회 등과 깊은 연관을 가지며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승동교회의 초기 역사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발표한 김일환 교수(서울장신대)는 '근당골교회-홍문동교회-동현교회-승동교회'로 이어지는 역사 중 동현교회 시기와 1905년 승동으로 이전한 이후 교회 변화에 대해 발표했다. 김 교수는 승동교회 초기 교회 분규와 신분 계층 문제 등 여러 어려움을 해결해가며 발전하는 승동교회의 모습을 분석했다.


김동현 기자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