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어서, 차별 없는 음악으로 |2024. 09.27
[ 최은의 영화보기 ] <디베르티멘토>(2022)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에 빠지는 대목이라면서, 왜 이렇게 무거운 코드가 많이 나오는 거야?" 프로코피예프의 발레곡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기사들의 춤'을 피아노로 연주하던 소년이 묻자, 소년의 연주를 지휘하던 소녀가 답했다. "가면무도회였지만 줄리엣이 춤을 추는 상대가 로미오인 것을 가족들이 눈치채 버렸어. 브라스의 연주는 로미오의 가슴이 뛰는 소리야. 빠밤! 빠밤!" 클래식 음악을… |
|
그분의 더 넓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 |2024. 08.14
[ 최은의 영화보기 ] <클레오의 세계>(2023)
여섯 살 클레오(루이스 모루아팡자니)는 엄마를 일찍 잃고 아빠와 살고 있다. 어느 날 클레오를 돌보던 보모 글로리아(일사 모레노 제고)는 모친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인 서아프리카 카포베르데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언제 다시 올 거냐는 물음에 "이번에는 안 돌아와"라고 글로리아는 답했다. 글로리아를 그리워하며 우울해져가던 클레오는 방학을 맞아 그녀를 만나러 가는데, 거기서 클레오는 글로리… |
|
귀를 열어야 할 이유 |2024. 07.18
[ 최은의 영화보기 ]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
1940년 5월부터 1943년 11월까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1901-1947)는 96만 유대인을 포함한 약 110만 명 학살의 집행자이면서 5남매를 둔 평범한 가장이었다. 담장 너머로 시체 소각장의 연기가 매일 솟아오르는 수용소 관사에 살면서 루돌프는 수영장과 텃밭과 정원이 아름다운 집을 가꾸었고 때마다 생일파티를 하고 강변에서 가족소풍을 즐기며 밤이면 딸들에게 … |
|
줄타기의 예술, 다림줄의 신앙 |2024. 06.18
[ 최은의 영화보기 ] '찬란한 내일로(2023)'
영화감독 조반니(난니 모레티)는 원칙이 많고 그래서 못마땅한 것도 많다. 세상에, 촬영장에 주연 여배우가 '뮬'을 신고 나타났다. "신발이 앞이 막혀 있으면 뒤도 막혀 있는 게 옳고, 발가락이 안보이면 뒤꿈치도 안보여야" 하는데 말이다. 조반니에게 뮬은 신발이 아니고 슬리퍼이면서, "세상에 대한 비극적 시선"이다. 게다가 이 배우는 툭하면 즉흥연기로 대본을 무시하고 감독의 작품 해석에 사사건… |
|
'승리'보다 중요한 건 '함께' 하는 것 |2024. 05.22
[ 최은의 영화보기 ] 홈리스월드컵(The Beautiful Game)(2024)
동네 축구장에서 현란한 발기술을 자랑하던 비니(마이클 워드)를 축구감독 맬(빌 나이)이 홈리스 축구팀에게 소개한다. 누가 봐도 오합지졸인 그들은 자기들이 잉글랜드 국가대표라고 주장했다. 맬은 그들과 함께 홈리스 축구대회가 열리는 로마에 가자고 제안하는데, 비니는 자기는 홈리스가 아니므로 자격이 안 된다며 거절한다. 잠시 후 우리는 직장도 집도 차도 아내와 아이도 있다던 비니에게 직장은 일을 … |
|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두 여성의 이야기 |2024. 04.25
[ 최은의 영화보기 ] ‘호구’라 불리는 그들: 세기말의 사랑(2023)
'정직테크'의 경리과장 김영미(이유영)는 외모가 비호감이라는 이유로 직장동료들 사이에서 '세기말'이라고 불린다. 노골적인 혐오 시선 때문에 영미는 직원식당을 이용하는 것조차도 불편한데, 혼자 밥을 먹는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다가온다. 다정한 말을 건네며 영미의 식판에 소시지를 나눠 담아주는 남자는 배송기사 구도영(노재원)이었다. 이후 영미는 구도영이 빼돌린 미수금을 도영 본인도 모르게 채워… |
|
부활의 계절에 만나는 “왜 (다시) 사는가?”라는 질문 |2024. 03.15
[ 최은의 영화보기 ] 라쎄 할스트롬의 '베일리 어게인 A Dog’s Purpose'(2017)
'베일리'는 개 이름이다. '베일리 어게인'에서 이 강아지는 매번 다른 품종으로 다른 임무를 띠고 다시 태어난다.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 덕에 미국인들에게는 특히 친숙할 이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헌신적이고 착한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 '멋진 인생 (It's a Wonderful Life, 1946)에서 주인공 조지 베일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다리 위에 올라섰다가 … |
|
희망, 닫힌 방을 열어야 할 이유 |2024. 02.09
[ 최은의 영화보기 ] 나의 올드 오크
잉글랜드 북부의 폐광 마을에 시리아 난민들을 태운 버스가 한 대 도착한다. 가뜩이나 집값이 떨어지고 마을이 몰락해 가는데 종교가 다르고 말도 잘 안 통하는 난민까지 수용하게 되어 마을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나 있다. T.J. 발렌타인(데이브 터너)이 운영하는 주점 '올드 오크'의 단골손님이자 오랜 친구인 찰리와 이웃들은 매일 이들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으며 혐오발언을 해댄다. 어느 날 이 곳에 … |
|
소년을 사로잡은 빛의 연대기, 혹은 영화 예술의 작은 역사 |2024. 01.12
[ 최은의 영화보기 ] 파벨만스
생애 첫 영화관람에 나선 다섯 살 샘에게 아빠 버트 파벨만(폴 다노)이 설명을 시작한다. "무서워할 것 없어. 커다란 손전등 같은 빛이 있는데 그 앞을 초당 24장의 사진이 빠르게 지나가. 이걸 영사라고 하지. 사진 한 장은 머릿속에서 15분의 1초씩 머물러. 그건 잔상효과야…" 반면 엄마 미치(미셸 윌리엄스)는 겁에 질린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영화는 꿈이란다. 잊히지 않…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