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신 증명: 안셀무스 대 가우닐로

존재론적 신 증명: 안셀무스 대 가우닐로

[ 인문학산책 ] 22

안윤기 교수
2021년 06월 30일(수) 14:09
안셀무스(좌)와 가우닐로(우).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초기 스콜라 신학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프로스로기온'에 기록된 다음 문장은 그의 사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주여, 저는 당신의 오묘함을 모두 알려 하지는 않습니다. 제게는 그럴 지적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진정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 원합니다. 믿기 위해 알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알려면 먼저 믿어야 하고, 믿음이 없으면 알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어야 알 수 있다"(credo, ut intelligam)는 문장을 발견하고, 이것이 향후 많은 신학자의 구호가 되었다. 신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단순한 호기심이나 불순한 생각에서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이 놓인 기반 위에서 그 분의 뜻과 섭리를 더 깊이 알아가는 지식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드러난 한 가지 사례가 그의 신 존재 증명이다. 이런 작업은 보통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시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안셀무스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프로스-로기온'(하나님께 말하다)이란 책 제목처럼 안셀무스는 '기도'하면서 그 유명한 존재론적 신 증명을 이야기한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기록되었는데, 정말 그 말씀대로 '어리석은 자', 즉 합리적 사고를 할 줄 모르는 바보만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다는 통찰을 안셀무스는 기도 중에 얻는다. 어째서 그럴까?

누가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일단 '하나님'이란 단어를 알아야 그 후에야 그런 분의 존재 여부를 논의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그 단어의 뜻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분', 즉, "그 무엇도 그보다 더 크다고 생각될 수 없는 분"(aliquid, quo maius nihil cogitari potest)이다. 이런 뜻을 생각한다면, 그 호칭에 해당될 분은 그저 우리 생각 속에만 머물 수는 없고, 반드시 현실에서도 존재해야 한다. 만일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우리 생각에만 머물 경우, 현실에도 존재하여 그보다 더 클 무언가를 우리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마치 '골짜기 없는 산'이나 '세 각을 갖지 않는 삼각형'처럼 애초 불가능한 것을 억지로 말하는 셈이니, 바보가 아니고서야 누구도 그런 모순된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머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존재를 100% 인정해야 한다.

이 증명에서 두드러진 점은 고도의 정교한 논리이다. 신학 영역 안에 논리적 사고가 대대적으로 들어온 것이다. 성경 구절이나 교부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신학 문제를 해결하던 전통적 방법이 아니라, 수도원 학교 수업에서 강조했던 논리학을 안셀무스는 적극 활용했는데, 예컨대 이 증명에서는 '모순율'(矛盾律, principium contradictionis), 즉 모순된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원칙이 '스모킹 건' 역할을 담당했다. 신앙이 우선이지만, 그 기초가 든든하다면 그 위에 얼마든지 세속학문을 선용해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앎을 넓혀갈 수 있다고 안셀무스는 생각한 것이다. 특히 헬라 철학에서 전수된 논리학은 그 선명성과 확실성에 있어서 매우 신뢰할 수 있는 도구로 여겼다.

새로운 신 증명 방법이 알려지자, 이에 대한 반격도 나왔다. 가우닐로(Gaunilo)라는 수사가 '바보를 변호하며'란 책을 썼다. 안셀무스가 하나님의 존재를 못 믿는 사람을 '바보'라고 몰아치니까, 이에 맞선 것이다. 물론 가우닐로가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안셀무스가 제시한 증명 방식은 너무 심하며, 어떤 것을 단순히 '생각하는'(cogitare) 것과 '아는'(intelligere)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각에 있어서야 "가장 완벽한 섬" 같은 온갖 상상의 세계도 다 허용되지만, 그렇다고 그런 섬이 이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고 말할 수 없듯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상상이 아니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경험의 증거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소위 '증명'이란 명목으로 그저 말 장난을 했을 뿐이어서, 거기서는 진정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실질적 지식이 생겨날 수 없다고 가우닐로는 주장했다.

가우닐로의 이야기는 경험주의 인식론과 흡사하다. 그리고 안셀무스의 논변은 합리주의 인식론의 총화였다. 600년 후 근대철학사에서 나타날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대결이 11세기 존재론적 증명에서 살짝 모습을 내보인 셈이다. 두 입장 모두 어느 정도 지적 교양이 축적된 인간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힘과 개념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 여부 같은 어마어마한 주제를 이해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학문의 도구를 가지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 비유컨대, 하나는 코끼리의 코를, 또 다른 하나는 코끼리의 꼬리를 파악하는 정도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온전한 지식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알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더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믿음은 무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추구한다(fides quaerens intellectum).

안윤기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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