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문제: 고트샬크 대 에리우게나

예정론 문제: 고트샬크 대 에리우게나

[ 인문학산책 ] 20

안윤기 교수
2021년 06월 25일(금) 10:16
고트샬크(좌), 에리우게나(우)
'예정론'은 기독교 신학이 형성되던 초창기부터 큰 논쟁거리였고,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껄끄러운 '뜨거운 감자'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연약한 죄인을 구원하신 큰 은혜에 집중하면, 예정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예정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면, 이미 태초에 운명이 정해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 아무 의미가 없으며, 또 버림받아 지옥에 떨어질 자들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 같다.

이런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 혹자는 예정이 아닌 예지(豫知),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은 그 결과를 알지만 어쨌든 각 사람이 자기 책임하에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천국행/지옥행이 갈린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고, 혹자는 딤전 2: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같은 성구를 인용해 만유구원론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엡 1:4~5("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같이 예정론을 강하게 지지하는 구절도 있고, 심지어 롬 9: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이나, 롬 9:18("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같이 이중예정론을 연상케 하는 구절도 있다.

'이중예정론'(praedestinatio gemina)은 구원 은총 받을 자뿐만 아니라 지옥 형벌 받을 자도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는 입장이다. 이 표현은 세비야의 주교 이시도르(Isidorus Hispalensis, 565~636)의 책에 처음 등장하지만, 그 사상적 뿌리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의 후기 작품, 특히 '은총과 자유의지', '타락과 은총' 같이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나온 작품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입장은 당대에 이미 논란거리가 되며 가톨릭계에서 정통교리로 승인받지 못하다가, 16세기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뱅에 의해 주목받게 되고, 도르트 신조(1619)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8)에 채택된다.

바로 이 교리가 '중세 신학의 첫 희생자'를 낳은 화근이었다. 오르베의 수도사 고트샬크(Gottschalk, 803~869)는 아우구스티누스 저작을 읽다가 이 교리를 깨닫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정적들은 그를 마인츠 종교회의(848)에 보내 재판을 받게 했다. 재판관은 그와 악연이 있던 라바누스 마우루스(Rabanus Maurus, 780~856)였다. 그는 고트샬크가 이중예정론을 말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삶을 살아갈 의욕을 빼앗고,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 등 돌리고 멸망으로 치닫게 만든" 중한 죄를 범했다고 판결했다. 무기징역과 침묵이 명해졌다. 그의 책을 불태우고 공개석상에서 그에게 태형을 가했다. 그리고는 관할교구 주교인 랭스의 잉크마르(Hinkmar, 806~882)에게 그를 보냈다.

잉크마르는 그를 재판하기에 앞서 여러 학자의 의견을 청취하려 했다. 여러 의견서가 제출되었는데, 그중 서프랑크 황실학교 교사인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tus Eriugena, 800~877)의 서신도 있었다. 그는 "이중예정론은 말도 안 되는 이단사상"이라며, 고트샬크 정죄는 정당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논리가 독특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시기에, 뭔가를 '미리' 알거나 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영원에는 시간적 선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신에 예정을 암시하는 성경 구절은 은유적으로 잘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에리우게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 "죄악은 결여(privatio)일 뿐이고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책임 소재를 따질 필요가 없고, 지옥도 공간적으로 생각하지 말 것을 권했다. 로마서 7장에서 볼 수 있는 사도바울의 번민,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이다. 지옥은 심리상태일 뿐이고 어느 특정 공간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니, 지옥에 갈 사람을 하나님이 예정했다는 이중예정론은 헛소리이다.

잉크마르 같이 교회 조직 운영을 책임진 사람이 볼 때, 이중예정론 같이 껄끄러운 주장을 고집한 고트샬크를 에리우게나가 비판해 준 것은 고맙지만, 죄악과 지옥의 실재성을 부정한 후자의 입장은 불길을 잡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의견서 내용을 접한 주교들은 격앙했고, 곧바로 여러 종교회의가 소집되어 에리우게나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에리우게나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충실했을 뿐이었다. 다만 그는 '참된 종교' 같은 초기 아우구스티누스 저작에 주로 의거했고, 후기 저작에서 논한 은총과 예정 문제는 초기 사상의 빛 아래서 재해석하려 했다.

고트샬크와 에리우게나 모두 우직한 학자였다. 그들은 성경과 교부 문헌에 충실했지만 그 열정이 과도했고 해석의 시각이 통전적이지 못했다. 그들의 이론은, 교회를 실무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성직자에게도, 교리를 배워 일상에서 실천해야 하는 성도에게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바르트와 몰트만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예정론의 문제는 예민하니, 이와 관련해서는 칼뱅의 권고대로 인간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경륜에 온전히 내맡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안윤기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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