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 프랑크인의 로타 십자가

보수와 진보: 프랑크인의 로타 십자가

[ 인문학산책 ] 18

안윤기 교수
2021년 06월 07일(월) 08:08
정치권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싸움이 치열하던 무렵, 어떤 대학생이 "보수란 과거의 낡은 것을 무조건 지키려는 나쁜 사람들이고, 진보가 사회를 발전시키려고 애쓰는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필자는 황당해한 적이 있었다. 그의 말은 유치원생이나 할 법한 단순무식한 이분법이기 때문이었다. 또 정반대로 어떤 이는 '보수정통 신학'을 강조하면서, 누가 전통적인 것에 조금만 변화를 줘도 그를 "자유주의 신학", "변절", "이단"이라며 몰아치고 겁박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도 너무 성급하고 단편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글자 표현 그대로, '보수'는 뭔가를 지키려는 태도를 말하고, '진보'나 '개혁'은 변화를 주려는 태도를 말한다. 둘은 상반된 태도이지만, 둘 다 필요하다. 기존에 소중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잃지 않으려는 보수 자세가 좋겠고, 기존의 것이 현시대나 상황에 맞지 않아 불편을 초래한다면 개혁 자세가 필요하겠다.

역사를 보면, 시대가 바뀌면서 새 것이 출현하지만, 가끔은 옛 것이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진부한가? 아니다. 도리어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강한 생명력을 보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일 확률이 높다. 문학이나 음악의 '고전'(古典) 작품이 그러하다. 때로 사람들은 '원천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모토를 외치며 일부러 옛 것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응답하라' 시리즈 식의 단순한 추억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옛 것이 그저 과거의 가치만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당대에도 모종의 타당성을 가지기에 재소환되는 것이다. TV에서 삼국 시대나 조선 시대 사극을 방영할 때, 대개 그것은 현대 정치 상황을 풍자한다고 하지 않던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프랑크 왕국(Frankenreich) 카롤링거 왕조 시대도 그러하다. 프랑크 왕국의 수도였던 아헨에는 옛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는데, 거기에 '로타 십자가'(Lotharkreuz)라 불리는 아주 유명한 보물이 있다. 높이 50cm, 넓이 38.5cm, 두께 2.3cm 크기에 140여 개 보석으로 치장한 멋진 십자가이다. 카롤링거 왕조를 계승한 신성로마제국 초창기에 제작되었으며, 새 황제가 등극할 때마다 즉위식 행렬의 맨 앞에서 일행을 인도하던 매우 상징적인 성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십자가 정면 중앙에 배치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 ~ A.D. 14)의 초상이 뜬금없게 느껴진다. 아니, 왜 독수리 홀을 손에 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십자가에 새겨져 있을까? 물론 십자가 후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도 희미하게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가 '신국론'에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간의 대결을 이야기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를 쉽사리 '교회'와 '로마 제국'의 대립으로 이해했듯이, 5세기까지만 해도 십자가와 로마 황제는 물과 기름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500년 후에는 이 둘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을까?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로마 제국이 무너지면서, 유럽 문명도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그 혼란기에 게르만족의 일파였던 프랑크인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겨우 국가체계를 정비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가장 절박했던 과제는 수백 년 간 지속된 무질서와 야만적 파괴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잘 정돈된 통치 질서,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평화와 번영을 그들은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희생과 고난이 아니라 도리어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하늘 새 땅의 영광을 의미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프랑크 황제 샤를마뉴와 신성로마제국 오토 대제를 세우시고, 그들의 통치를 통해 이 땅에도 천국 평화를 선물해 주신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 샤를마뉴는 로마 황제의 실질적 계승자로 볼 수도 있었다. 거대 영토의 체계적 통치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공동의 적인 야만 상태를 극복하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프랑크 왕국을 계승한 '신성로마제국'(Sacrum Imperium Romanum)의 명칭 자체가 그것을 의미했다. 그 나라는 신성한 하늘나라를 이 땅 위에 구현하면서 동시에 옛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하겠다고 자처한 것이다.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자신의 '신국론'을 후세의 프랑크인이 왜곡했다고 통탄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프랑크 왕국 사람들이 당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대 문화 유산을 끌어왔다는 점이다. 기독교 복음이나 로마 제국의 상징 모두 옛 것이지만, 수백 년 동안 지속된 혼란과 문명 파괴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 새로이 요청되었다. 고대 문물과 제도를 모방하려는 경향이 이 시기에 워낙 두드러졌기 때문에 혹자는 카롤링거 르네상스 문화에 별다른 독창성이 없다고 저평가하려 들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이미 철저히 파괴된 폐허 상태에서 시작해 고대 세계의 옛 영토와 문명 수준을 회복한 것이니, 그것만 해도 큰 업적이었다고 봐주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기독교 왕국과 로마 제국 이념의 통합' 같은 미묘한 변화도 발견되지 않았던가? 이것은 '신국론'에 담긴 '두 왕국' 사상의 왜곡이 아니라 개혁이었다. 이처럼 옛 것을 보존하면서도 새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화시켜 나가는 것, 10세기 프랑크 왕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보수와 진보의 공존'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안윤기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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