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소보다 못해서야 쓰겠느냐!

사람이 소보다 못해서야 쓰겠느냐!

[ 목양칼럼 ]

전종은 목사
2021년 06월 02일(수) 08:30
필자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송아지 한 마리를 시장에서 사서 집으로 몰고 오셨다. 가난한 살림에 송아지는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송아지를 애지중지 키우셨다. 나의 성장과 함께 송아지도 자라나 제법 큰 어미 소가 되었다. 어릴 적 우리 집 암소는 사람을 떠받거나 공격하는 일이 없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그저 열심히 일하는 온순한 암소였다.

농기계가 별로 없었던 시절에 아버지는 그 암소로 논도 갈고 밭도 일구셨다. 때가 되면 새끼도 쑥쑥 잘 낳았다. 아버지는 또 새끼를 키워서 값이 나갈 정도가 되면 시골 장터에 내다 파셨다. 아버지는 송아지를 판값으로 나의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 등록금까지 대셨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시골집 마루에 걸터앉아 한가롭게 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낯선 트럭 한 대가 마당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트럭이 마당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집 뒤편에서 우리 집 암소를 끌고 나오시더니 소를 억지로 차에 실으려고 하셨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는 깜짝 놀라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아버지, 왜 이러시냐!'고 따지듯 물었다.

아버지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씀하셨다. "이 소는 네가 태어났을 때 들여 온 소란다! 지금까지 우리 집에 있는 동안 열심히 일하고 때마다 새끼도 잘 낳아서 너를 대학까지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었지!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일할 수도 없고 새끼도 낳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팔아야 되겠구나!"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면서 소를 다시 트럭 위로 밀어 올리셨다.

소는 한동안 마당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고 서 있었다. 이윽고 소장수와 아버지는 트럭 위로 소를 밀어 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트럭에 강제로 실린 암소는 머리를 뒤로 돌리더니 나와 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말 못하는 소이지만 그 날이 마지막임을 알았는지 소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소를 보는 순간 아버지도 울고 나도 울었다. 나는 우리 집 암소에게 너무나 고맙고 또 미안했다.

소를 트럭에 실어 보내고 한동안 아버지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텅 빈 마당만을 서성이었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아버지께서 말문을 여셨다. "소가 사람보다 나아! 저 소는 우리 집에 와서 모든 것을 다 주고 간 거야! 저 소 때문에 네가 대학까지 공부 할 수 있었어! 사람이 소보다 못해서야 쓰겠느냐?"

우리 집에 와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고 간 그 암소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충성됨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담임목사로 부름 받기 위한 첫 설교를 할 때에 나는 우리 집 소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한 설교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설교였고 나의 다짐이었다. 나는 우리 집 암소를 통하여 충성됨을 배웠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대박을 노리는 현대인들에게 충성됨은 매력 없는 단어이고, 말만 들어도 피곤한 단어일 것이다. 사람들은 충성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충성됨은 여전히 최고의 영적인 가치이다. 충성됨이 없이는 하나님의 좋은 동역자가 될 수 없다. 충성됨이 없이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인생이 될 수가 없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와 출중한 능력이 있어도 충성됨이 없이는 좋은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 충성됨은 한 마음(Single mind)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그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 충성됨이다. 집중할 때에 충성됨이 드러난다. 목회의 집중력이 떨어질 때마다 '사람이 소보다 못해서야 쓰겠느냐!'는 어릴 적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라 정신을 번쩍 나게 한다.



전종은 목사 / 평택 신흥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