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욕은 죄악인가?

정욕은 죄악인가?

[ 인문학산책 ] 17. 아우구스티누스 vs.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

안윤기 교수
2021년 05월 26일(수) 12:53
아우구스티누스(왼쪽)와 율리아누스.
갑작스러운 원고 청탁을 받았다. 목회자들의 교양 함양에 도움이 될만한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취지가 좋아서 흔쾌히 수락했지만, 무려 16회에 걸쳐 연재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며칠 동안 숙고한 끝에, 필자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서양 지성사> 중 우리에게 덜 알려진 몇 장면을 지면을 통해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도 ‘대결’ 내지 ‘결투’의 모습으로 서술하면 독자가 읽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되리라. 이런 구상을 하는 데 있어서, 쿠어트 플라쉬의 책 ‘철학의 전쟁터’(Kurt Flasch, Kampfplätze der Philosophie. Große Kontroversen von Augustin bis Voltaire, WBG, 2008)가 큰 도움이 되었다.

첫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이다. 고대 기독교 신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그는 평생 수많은 논쟁에 시달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싸움으로 잘 알려진 것은 펠라기우스(Pelagius, 354~418)와 겨룬 ‘은총과 자유의지’ 논쟁일 것이다. 이 싸움은 418년 조시모 교황이 펠라기우스를 출교시키고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정죄한 것으로 일단락된 것으로 보였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의 주교 18인이 반발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죽는 순간까지 맹렬히 공격했던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에클라눔의 주교였던 율리아누스(Julianus of Aeclanum, 386~455)였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와 에클라눔의 주교 율리아누스 간의 대결을 오늘 다루려 한다.

논쟁점은 ‘정욕’(concupiscentia)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있다. 이 라틴어 단어를 분석해 보면 ‘콘-쿠피(드)-스켄티아’(con–cupi(d)-scentia)인데, 여기서 어근을 이루는 ‘큐피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단어는 ‘갈망’, ‘욕구’를 뜻한다. ‘큐피드의 화살을 맞았다’란 표현을 요즘도 종종 쓰지 않는가? 그리고 ‘큐피드’의 헬라어 표현이 ‘에로스’(ἔρως)이다.

인간에게는 다양한 욕구가 있으며,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라틴어 성경 ‘불가타’에 실린 ‘가르침을 받으려는 소망’(disciplinae concupiscentia, 지혜서 6:17), ‘지혜를 추구함’(concupiscentia sapientiae, 지혜서 6:20)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단어가 긍정적인 의미, 혹은 중립적인 의미로 쓰일 때도 있다. 그러나 훨씬 더 높은 빈도로 이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데, 아마도 다음의 성경 말씀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요한1서 2장 16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장 14~15절). 그리고 흔히 ‘인간의 본능적 3대 욕구’로 식욕, 수면욕, 성욕을 드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와 율리아누스의 논쟁에서 핵심이 되었던 ‘정욕’은 성적인 욕구를 의미했다.

정욕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매우 큰 문제거리였다. 그는 음행을 죄악의 대표사례로 생각했다. 회심 후에 그는 재물과 명예, 사회적 지위에 대한 모든 욕심을 다 극복할 정도로 마음을 비웠지만, 그래도 그를 끝까지 유혹하고 집요하게 괴롭힌 것도 바로 이 성적 욕망이었다. ‘원죄’ 교리를 설명할 때도 그는 정욕을 생각하면 쉽게 이 교리가 이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잔잔하던 내 마음을 유혹해서 요동치게 하고, 선행만 하겠다고 다짐한 내 의지를 굴복시켜서, 결국 원치 않던 죄악을 범하게 만드는 강력한 원죄의 힘을 정욕만큼이나 잘 보여주는 사례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정욕의 사슬에 묶인 인간이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것은 가당치 않을 것이다.

심지어 결혼까지도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고, 사도 바울의 권고대로 독신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결혼과 정욕』에서 그는 결혼을 인간이 정욕의 노예로 매인 상태로 묘사했다. 부부에게는 성 행위가 도리어 의무가 되니, 남자는 이로써 ‘아내의 왕국’을 섬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부모의 성적 결합에서 태어나므로, 아담의 원죄가 유전을 통해 후대 모든 사람에게 전이된다는 교리도 나왔다. 갓난아이조차도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므로, 유아세례의 시행은 정당하다.

이와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 대해 율리아누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그는 정욕을 인간이 얼마든지 훌륭하게 사용할 수 있는 중성적 에너지라고 말했다. 그것은 인간에게 원래부터 부여된 본성인데,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성적 욕구를 원죄 차원에서 보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완전한 우주를 비하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본인도 “피조 세계는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또 아담의 원죄가 유전된다는 주장을 율리아누스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죄인이 되려면, 그가 일단 세상에 태어나서 그 무엇이든 죄를 범해야 할 터인데, 아예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죄인이라는 선고를 받는다면, 이것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궤변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전에 주장했던 자유의지 이론과도 상충할 것이다. “인간 본성의 한 부분에 죄가 있다는 당신 생각에 동의하라는 요청에 나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연성도 없고, 사실도 아니며, 정의롭지도 못하고, 경건하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악마가 인간을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자유의지 이론에도 위배됩니다.” 율리아누스의 공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이 마니교와 비슷하다고 비난했다. 원죄론이나 지나친 금욕적 태도, 결혼과 성 행위를 죄악시하는 것은 마니교의 이원론적 사고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5세기 초반을 뜨겁게 달구었던 두 주교의 대결은 정욕을 엄청난 원죄의 굴레로 볼 것인지, 아니면 그 자체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본성으로 주신 선물인데 때때로 인간이 오용하여 우연히 문제가 된 것으로 볼 것인지의 입장 차이에 달려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오랫동안 전자의 입장이 승기를 잡았지만, 근대, 특히 19세기에 프로이트가 무의식 세계를 발견하고, 그 세계를 주도하는 ‘리비도’(libido)를 환기시킨 이후 현대 사회는 점점 더 정욕에 대해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관용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정욕은 죄악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물인가? 과거의 고민거리가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의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는 것 같다.

안윤기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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