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동산의 오월

선교동산의 오월

[ 주간논단 ] 격랑 속에 피어난 에큐메니칼 정신

송인동 교수
2021년 05월 24일(월) 08:45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풍장(風葬)터이던 죽음의 언덕에 상수리, 갈참나무, 굴참나무, 흑호도, 페칸 등 구황(救荒) 유실수를 심고서, 어려움이 있어도 선교지를 지키겠다는 마음도 심었다. 이 숲은 자라면서 일제강점기 선교동산에 전시방공호가 굴착되는 것이며, 6.25 전란 때 선교사묘역 돌비석이 깨질 정도로 치열하였던 총격전과 수많은 어린 생명들의 속절없이 죽는 것을 겪었다. 1980년 군사쿠데타와 헌정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의 계엄군이 선교동산 숲길을 걷는 선교사를 향해 총을 쏘고 선교사 사택을 감시하던 것과, 선교병원에 헌혈을 하고 귀가하던 여학생이 조준사격으로 숨진 것도 이 숲은 지켜보았다. 환란 속에 선교동산 숲속 선교사 사택들은 계엄군의 총과 칼을 피해온 청년 대학생들의 도피성이 되었다.

1980년 5.18 당시 양림동 선교동산의 광주선교부는 미국 남장로교, 미국 남침례교, 독일 교회, 광주 지역 교회들이 연결이 된 에큐메니컬 마을이었다. 교파를 넘어서 선교사들은 1980년 광주에 대한 진실을 공유하고 서로 사실을 교차점검하며 기록을 남겼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1980년 광주 진상 관련 "가장 균형잡힌 기록이자 분석"이라고 평한 원요한 선교사(Rev. John T. Underwood: 장로교 첫 선교사 원두우 목사의 손자, 당시 호신대 교수)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신동아」 2004년 6월호에서 발췌): "내 생애를 통해 한국인 친구들에게서 이처럼 경이로운 자긍심을 느껴본 적이 없다. 5·18을 겪으면서 내가 느낀 점이 바로 이것이다…잊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점을 강조하고 싶다. ① 광주는 폭동이 난무한 도시가 결코 아니었다… ②…광주의 증오는 아주 못되게 행동한 공수특전단과 중앙정부에 대한 것이었으며… ③ …광주 사건은 시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행위 때문에 일어났고… ④ 광주 사건 전 과정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느낀 점 한 가지는 시민 전체가 기적에 가까울 만큼 자제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원진희 선교사(Mrs. Jean W. Underwood: 원요한 선교사 부인, 당시 호신대 교수)는 신군부의 광주폭격 계획 때문에 광주를 떠나라는 미국 관리의 급한 전언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아무도 광주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남아있음으로써 끼칠 수 있는 어떤 영향이 우리가 떠나버리게 되면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느꼈다."라고 증언하였다.

허철선 선교사(Rev. Charles Betts Huntley: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 호신대 출강)는 광주의 진상을 담은 사진들을 가지고 삼엄한 감시망을 피하여 해외에 알렸으며 "광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도하기 위하여 전 세계로부터 찾아오는 사람들을 우리는 맞이하였다… 온 세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타지역 사람들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여러 달이 되도록, 심지어 광주사태 후에 여러 해가 지나도록 모르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미국 남침례교 배태선 선교사(Rev. Arnold A. Peterson: 교회사학자)는 광주 상공에 군용 헬기들이 거리의 시민들을 향하여 기총소사를 하였다는 것, 공권력이 없었으나 광주는 질서가 있었고 민간 재산 피해가 없었다는 것 등을 증언하였다.

선교사인 남편들과 5.18을 직접 겪고 목도하였던 남장로교 허마르다 선교사(Mrs. Martha Huntley: 교회사가)와 남침례교 바바라 피터슨 선교사(Mrs. Barbara Peterson)는 2019년 야당 국회의원 일부가 북한개입설을 주장했다는 보도를 접하고는 대한민국 국회의장에게 항의 이메일을 보내어 그 주장이 명백한 거짓임을 증언하였다. 한편, 1980년 당시 타임(TIME) 뉴스잡지에 빨간 깃발을 꽂은 차량에 탄 광주 젊은이들의 사진이 실려 해외에서는 좌익의 소행이라고 시사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허마르다 선교사는 타임지에 편지를 보내어 그 차량이 바로 광주기독병원에 피가 부족하여 헌혈을 돕던 차량이었음을 증언하였다. 군의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 "우리 병원만 보더라도 두 시간 안에 99명의 부상환자들과 14명의 사망자들이 들어왔다. 부상자 중에는 두 다리에 총을 맞은 9살 남자아이도 있었다."고 허 선교사는 기록하였다.

선교동산에 자리한 호신대도 격랑이 엄습하였다. 호신대 재학생 문용동은 광주 시민의 안전을 위하여 당시 도청 지하 무기고를 지키다 5월 27일 계엄군의 총에 사망하였다. 재학생 남성현은 계엄군들에게 거의 죽을 정도로 구타를 당하였으며, 당시 재학생 김병균, 장헌권, 정종득, 박형대 등을 비롯, 그 이후 이동균, 정석윤 등 호신 출신 목회자들은 5.18 진실을 알리기 위하여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고초를 무릅썼다. 조선 선교 기간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 서다 선교동산 묘역에 묻혀있는 유진 벨 선교사의 외증손 되는 인요한(Dr. John Linton)은 5.18 당시 도청을 사수하던 윤상원 대변인의 외신통역을 감당하였다. 호신대 교수이던 차종순 목사도 현장에서 외신 기자들에게 통역을 해주었다.

당초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설립된 그리스도인 기관들도 5.18 현장에 있었다. 광주YWCA의 조아라 장로는 개신교 동지들을 이끌고 남동성당을 찾아가 시민에 의한 수습 노력의 첫 단추를 끼웠다. 이후 시민 수습대책 기구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5월 26일 이른 아침 개신교와 가톨릭의 그리스도인들은 수습을 위해 십리를 걸어가 계엄군의 전차대열과 마주하였다. 외신들은 이를 '죽음의 행진'이라 기록하였다. 5.18 시민 수습위원으로 혹은 진실규명에 헌신한 후 5.18 묘역에 묻혀 있는 광주YMCA 지도자로는, 백영흠 목사, 명노근 장로, 이광우 교수, 윤영규 장로, 강신석 목사(이상 이사장 역임), 이성학 장로, 김천배 선생, 이영생 집사(이상 실무지도자 역임) 등이다. 선교동산 기슭에서 그 첫 전파를 내보냈던 기독교광주방송(광주CBS)은 당시 언론매체 중 5.18 관련 정론 보도로 광주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신군부의 검열과 언론통폐합의 찬서리를 맞아야 하였다.

광주기독병원은 의료진에서 문지기에 이르기까지 온 직원이 불철주야 수술과 치료, 헌혈과 돌봄에 헌신하였다. 당시 원장 허진득 장로는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총동원하여 부상자들을 수용하였다. 응급실장이던 김성봉 장로와 수술진은 밤낮으로 수술에 매달렸으며 계엄군이 사용금지된 납탄을 시민들에게 사격하였다는 것을 증언하였다. 상황실장 최평웅 장로는 병원의 총력 대응을 뒷받침하며 대외업무를 감당하였으며, 광주와 광주시민을 위한 기도시간에 탄식과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병원 직원들과 선교사들이 참석한 예배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선교동산 발치에 자리한 기장 양림교회는 성도들이 5.18에 참여하여 은명기 담임목사가 신군부의 추적에 몸을 피하게되자 미국 감리교회의 선한용 목사가 와서 설교를 대신하였다. 선 목사는 광주의 진실을 담은 기사를 혁띠에 숨겨 미국에 가 스티븐슨 상원의원에게 편지를 썼고, 이 상원의원은 국무성에, 국무성은 한국의 신군부에 인권을 위한 '주의 깊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통합 양림교회의 조원곤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으로서 1980년 1월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80년대를 향한 교단의 입장"을, 5월 17일 "정부는 전 국민의 여망인 민주화를 구현하기 위한 일정을 단축, 선명히 할 것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5월 19일 "본 교단 대표자들은 타 교단장과 함께 대통령을 만나"는 것과 "조속한 시일안에서 본 교단의 위로 대표단을 현지에 파송하"는 것 등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전국교회에 구호헌금을 실시하였다. 이는 신교와 구교를 통틀어 매우 신속한 조처였다. 조 목사는 세계교회협의회와 소통하였으며, 주일학교를 과외로 금지한 신군부에 대표단을 보내어 이를 시정하였다.

총회장 조원곤 목사, 전 총회장 한완석 목사를 비롯 광주 시내 개신교회를 망라한 광주기독교비상구호대책위원회가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어 사망자, 부상자, 구속자 등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모금을 하고 현장을 수습하기 위하여 수고하였다.

백년이 넘은 선교동산이 다양한 수목이 어울려 숲을 이루었듯이 5.18현장의 그리스도인과 교계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에큐메니컬 정신으로 동족의 수난에 함께 하였다.



송인동 교수/호남신대·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및 세계YMCA연맹 실행이사, 광주양림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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