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없으나 은혜로 임하는 사역자임을 잊지 말자

자격없으나 은혜로 임하는 사역자임을 잊지 말자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누가복음 <4>

왕인성 교수
2021년 04월 27일(화) 11:04
예수님은 첫 설교를 통해 가난한 자, 병든 자, 귀신들린 자, 눌린 자, 소외된 자, 죽음에 처한 자를 자유롭게 하시는 복음 전파를 사명으로 설파하셨다(4:16~19). 예수님이 사역을 수행하시면서 이 사명을 이어갈 제자들을 선발하고 교육하시는 내용이 5~6장의 중심이 된다.

우선 예수님은 가장 자신 있는 고기잡이의 실패로 낙담해있는 베드로를 찾아주셨다.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풍어를 경험한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자, 주님은 베드로와 일행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다 (5:1~11). 이 사건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지식과 함께, 그분이 제자로 찾으시는 이들은 주님을 만나 자신의 분명한 한계를 인식하고, 아무런 자격 없는 죄인이라고 깨닫는 자임을 알게 한다. 이 화두는 누가복음 안에서 제자도가 다루어질 때마다 반복된다. 곧 하나님 앞에 자격 있음을 과신하며 주장하는 이들과 자격 없어 은혜로만 주께 나아가는 이들이 계속적으로 대조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역자는 제자도의 첫 걸음으로 자신의 자격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사역이 익숙해질수록 스스로를 자격 있는 사역자로 인식할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만선은 장차 사람을 낚는 어부의 일이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약속과 예표가 된다. 그러나 누가는 무조건적인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씨 뿌리는 비유(8:4~15)를 통해, 많은 열매가 있기 전, 제자로서 복음 전파의 여정 동안 적지 않은 고난과 반대를 통과하게 될 것이라는 균형적인 가르침을 제시한다.

5:12~26에는 예수님의 권위가 드러나는 두 가지 이적, 나병환자와 중풍병자의 치유가 다루어진다. 당시 나병은 가정과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가져왔다(참조. 레 13:45~46). 사람들은 위생상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나병환자와의 접촉을 통한 부정함의 전달을 두려워했겠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정결로 부정함을 몰아내신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겠으나 예수님은 친히 나병환자의 환부에 손을 대어 고쳐주셨다. 우리의 아픔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외면할 때에도, 주님만은 우리의 영육간의 환부에 친히 손을 대어 고쳐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중풍병자의 이야기는 새로운 주제를 추가시키는데, 곧 예수님의 죄를 사하시는 권세이다. 모든 질병이 죄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류의 질병 역시 영혼의 질병인 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중풍병자의 치유는 예수님의 능력이 질병뿐 아니라, 죄의 영역까지도 아우르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 1:1~3).

소외된 이를 찾아주시는 예수님의 행보는 레위를 제자 삼으신 사건과 연결된다(5:27~32). 레위는 세리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로마에 빌붙어 사는 매국노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경제적 안정은 누릴지라도, 사람들에게 배척되는 외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레위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잔치를 베풀어 동료 세리들에게도 예수님을 소개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자격이 없는 부정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자,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주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들 중 누가 진정 병든 자였을까?

소외된 자를 향한 주님의 다가서심은 누가의 중요 주제이다. 특이한 것은 레위는 세리 집단이라는 악의 소굴에서 본인이 빠져나온 것으로 감사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 마냥 자신만의 거룩을 위해 단절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레위는 오히려 동료 세리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은 주님을 만났다고 세상과의 단절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예수님의 접촉점을 만들어 주님을 소개하는 것이 주요한 사명이다(참조. 고전 5:10).

이제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긴장이 본격화되는데, 이른바 안식일 논쟁이 그 긴장을 심화시킨다(6:1~11).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예수님이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일로 비판하자,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이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먹었으나, 하나님께서 생명을 위하는 일인 까닭에 죄를 삼지 않으셨던 일을 상기시키시며 안식일에 무엇을 하고 할 수 없을지를 결정하는 분은 인자이신 예수님이시라고 선언하신다. 이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의 치유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비판하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일의 정당성을 선포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응급상황은 안식일에 치료할 수 있으나, 손 마른 자는 다음 날 고쳐도 되었다고 주장하였을 것이다. 우리 역시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면, 손 마른 자의 평생의 한과 소원에는 눈을 감고 내 기준으로 의를 정하는 바리새파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나면서 손 마른 자는 모든 상황이 그리고 평생이 응급상황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언제든 안식일 규정에 우선하여 행해야 할 일이었음을 천명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을 살리시는 일을 위해 열두 제자를 택하여 부르셨다(6:12~16). 그리고 예수님은 산상수훈과 대조되는 이른바 평지설교를 시작하시는데, 긴 내용은 성경 본문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6:17~49). 전체 내용은 예수님의 메시지에 대한 두 가지 반응으로 정리할 수 있다. 고난을 겪게 될 수 있음에도 전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헌신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보다 현재의 만족을 우선시하면서 세상을 향해 걸어갈 것인가? 부와 특권을 추구하는 번영신학과 달리, 좁은 길과 희생을 감당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소극적으로는 약속대로 종말의 때에 우리의 수고에 대해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길 기대하는 것이지만, 보상과 상급의 기대가 그러한 삶의 주된 이유가 된다면, 우리의 믿음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마태복음에 보면 상급을 운운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상급은 주어질지라도,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 까닭이다(마 19:27~30). 따라서 보상에 대한 기대보다 날마다 하나님의 성품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것이 건강한 제자도의 근본임을 잊지 말자.

왕인성 교수 / 부산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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