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선물인 은혜

완전한 선물인 은혜

[ 인문학산책 ] 13.창세기 22장에 대한 다른 해석(2) 자크 데리다

박원빈 목사
2021년 04월 20일(화) 13:19
철학자도 성경을 읽는다. 다만 설교자와 '아주 다르게' 읽을 뿐이다. 현대 프랑스 철학자 중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어떻게 믿음의 이야기를 바라볼까? '죽음의 선물'(The Gift of Death)이란 책에서 아들을 번제로 바친 아브라함의 신앙을 선물의 개념에 비교한다. 데리다가 정의하는 선물은 어떤 것인가? 데리다는 선물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과의 물질적, 정신적 교환에 주목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선물은 "불가능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 그 자체이다"(Not impossible but the impossible)이다. 쉽게 말해 완전하고 순전한 선물은 이 세상에 없다는 부정적인 결론이다. 왜 이런 정의를 내린 것일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데리다가 이렇듯 완전한 선물을 철저히 부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때(혹은 받을 때) 그 선물은 이미 주고 받음이라는 경제적 순환의 고리로 빠져들게 되어 선물이 갖는 고유한 개념 자체가 붕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흔히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처럼 완전한 선물은 개념적으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완전한 선물의 개념에는 상호의존성, 보상, 교환, 선물에 대한 보답 등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내가 무엇을 주고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바란다면 이미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물을 주는 쪽에서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선물이었다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크고 작은 선물을 받게 되면 여기에 대한 보상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심리이다. 물론 현실세계에서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에게 자신을 밝히기를 거부하여 익명으로 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는 말씀처럼 귀한 자선의 행위이다. 하지만 선물을 준 사람을 전혀 모르거나, 선물이 배달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을 제외하면 선물을 받는 순간 그를 칭찬하고 어떤 형태로든 상응하는 대가를 제공하려고 한다. 선물 받는 사람이 선물을 준 사람에 대한 대가는 물질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도 포함된다. 선물을 받는 순간 드는 고마운 마음조차도 순수한 선물이 가진 고유한 개념을 파괴시킨다.

데리다는 현실세계에서 이런 완전한 선물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창세기 22장을 읽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 속에 참된 선물의 원형을 발견하고 열광한다. 신앙과 초월의 세계, 즉 종교의 영역에서 완전한 선물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선물'에서 데리다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받고 독자 이삭을 바치려 했던 순간을 가리켜 철저한 고독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경험한 고독의 시간은 주위에 아무도 없으며 오직 전적인 타자(the wholly Other)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자리이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사실은 그가 어떠한 기대나 보상, 혹은 교환을 바란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아브라함은 어떠한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이삭을 희생시키려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삭을 희생시키고 나면 나중에 이삭 이상의 보상을 해 주시리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삭은 아브라함에겐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선물 중 최상의 선물이요 이삭 이상의 선물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미래에 어떤 상응한 보상을 해 주시리라는 어떠한 기대도 거부한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뿐이며 전적인 타자로서 그가 하나님이시라면 아브라함이 생각할 수 있는 이러한 경제적 보상의 순환 고리 밖에 계셔야 하기 때문이다. 독자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드는 순간 아브라함은 세상의 윤리와 의무와 책임을 뛰어넘어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절대적 의무(absolute duty)를 체험한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유일성만이 드러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엄청난 희생이 요구되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의 유일성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며 하나님과의 온전한 합일을 이루게 된다. 아브라함에겐 그 순간 하나님이 이삭을 뛰어넘는 선물인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신비로운 합일을 인간의 책임과 도덕을 뛰어넘는 "죽음의 선물"(gift of death)이라고 말한다. 아들을 바치면서까지 순종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절대적 의무에 응답"(a response to absolute duty)한 것이다.


죽음으로 계시된 완전한 선물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으며 오직 믿음의 행위로 이삭을 바치려 한다. 이삭이 "제물로 드릴 나무와 불은 있는데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자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the holocaust)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라고 대답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보상이나 기대를 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아브라함이 세상 윤리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아들 살해의 명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이 아들의 '죽음의 선물'(Gift of death)을 통해 열리게 될 새로운 무한의 세계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노년에 생리적으로 얻을 수 없던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자신의 생명 이상 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는 요구는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이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믿음 안에서 세상 의무를 초월한 절대적 의무에 응답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칼을 드는 순간 아브라함도 이삭과 함께 죽게 된다. 하지만 이 죽음의 시간은 영원한 무한의 세계로 들어가는 죽음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철학자의 눈으로 보면 '완전한 선물'은 현실 세계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초월과 종교의 영역이다.


완전한 선물의 증인인 '그리스도인'

논리적 정합성으로 무장한 철학자는 완전한 선물의 원형을 성경에서 발견했다. 데리다가 흥분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은 다시 신약의 복음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 구약에서 아들을 죽이려는 비정한 아버지를 하나님의 천사가 막으셨지만 신약의 성부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에 의해 아들을 그대로 두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신다. 구약의 완전한 선물의 그림자가 신약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이다. 철학자가 성경의 핵심을 잘 짚어주었다면 남은 일은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이 완전한 선물이 사변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세상에서 실현되는가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선물을 거저 받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박원빈 목사 / 약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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