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에 있는 사람들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

[ 땅끝편지 ] 러시아 최영모 선교사4

최영모 선교사
2021년 04월 21일(수) 10:14
고려인 교회의 첫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린 후 교회 일꾼들과 함께한 모습. 원내는 고려인 시인 갈리나.
몹시도 무덥던 여름에 교회 청년 세 명이 한국재외동포재단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열흘이 지나 검게 탄 얼굴로 돌아온 그들에게 한국 방문에 대한 소감을 물었더니 "너무 좋았고, 한국에서 살고 싶어요. 제일 좋은 것은 주위사방의 모든 사람이 우리와 똑같이 생긴 것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모습이 자기들과 같아서 그토록 편했다고 말한 그들은 고려인이다. 인종이 다른 나라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퍽 고단한 일이다. 고려인 시인 갈리나는 그의 시 '내 사랑의 말'에서 평생의 염원을 담아 '한 번만이라도 한국 너를 보았으면'하고 절규한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에서 '나는 위대한 러시아의 딸! 피로는 사랑하는 한국의 딸!'이라고 하면서, 염원을 체념으로, 체념은 영혼을 울리는 승화로 끝맺는다.

'꿈에서도 갈 수 없는 고향이 그리워/ 서러움으로 만져보던 겨울의 자작나무/ 가난한 소망이 세월을 삼키고/이른 비 늦은 비에 눈물을 뿌린다// 무너진 조국 조선이 싫어/ 거슬러 올라가고 또 올라간 나라 고려/ 즐겨 입은 흰옷이 백조같다 하여/ 러시아인이 붙여준 이름 '레베지'// 조선의 슬픈 백조보다는/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이 좋아서/ 한맺힌 마음으로/ 고집스레 지켜온 이름 '고려인'// 한밤중에 기차에 실려 짐승처럼 끌려간/ 한겨울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벌판/ 내팽개쳐진 채로 사막을 갈고 엎어/ 기름진 농토로 일구어낸 내 민족 '고려인'// 우리 모두 땅에서는 나그네와 외국인/ 돌아갈 영혼의 본향 하늘나라 있어/ 믿음으로 이 진리에 눈뜰 수만 있다면/ 고난의 역사는 은총의 기다림이어라(졸시 '고려인' 전문)'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지역의 한인 선교사들이 숙명처럼 만나는 이들이 있다. 바로 고려인들이다.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기까지 사실 소련은 우리에게 갈 수 없는 망명의 나라였다. 그런 까닭에 선교사들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채 깜깜한 상태로 들어와야만 했다. 그러니 시행착오는 얼마나 많을까? 하지만 와서 보니 거기에는 고려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인 선교사들과 현지인들 사이의 간격을 좁히며, 선교는 물론이고 언어와 문화에서도 중간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요셉을 미리 보내어 유대인들을 살리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면, 고려인들을 미리 보내어 유라시아 대륙의 선교를 할 수 있도록 하신 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 비록 그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이 이쪽도 저쪽도 아닌, 영원한 경계선에서 머무르는 것처럼 불편했더라도 말이다.

필자는 분명 러시아어로 말하는데, 어떤 러시아인들은 "러시아어로 말해주세요"라고 웃지 못할 요구를 종종 하던 1995년. 몇몇 고려인 지도자들이 밤에 찾아왔다. 이 도시에 거주하는 고려인의 숫자가 일만 명은 되는데, 늘 사회에서는 소수 민족으로 차별을 받고, 자녀들은 학교에서 자주 놀림을 당한다는 말을 그들은 아프게 토해내었다. 한국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오자 그들은 매우 기뻤다고 한다. 자기들을 위해 선교사들이 오는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선교의 초점을 러시아인들에게 맞추고, 같은 민족인 자기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학교와 사회에서도 소외당하는 데, 교회와 같은 민족인 선교사들에게까지 소외당하는 기분을 아느냐?"고 필자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필자의 물음에 그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겨우 대답했다. "목사님은 우리 고려인들을 위한 목사님이 되어주십시오." 주일은 물론 토요일에도 장거리 사역을 하는 필자가 시간을 내기 힘들다고 판단해서인지, 그들은 미안해하며 어렵게 부탁했다. 하지만 그들의 아픔이 서리처럼 내 마음에 내리기에 도저히 미룰 수 없었다. 얼마 후에 고려인을 위한 교회는 문을 열었고, 한글은 물론 한국 문화와 노래와 요리 등을 우리는 신나게 가르치고 신바람 나게 배웠다(한국 국회는 고려인이라는 말 대신에 재러교포로 부르기로 결의하였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고려인으로 지칭했다.)

최영모 목사 / 총회 파송 러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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