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새로운 문제에 새 방법을 찾았다

교회는 새로운 문제에 새 방법을 찾았다

주일성수 패러다임 갈등, 핍박이냐 재난이냐: 순종에서 희생으로

안교성 교수
2020년 03월 03일(화) 15:41
주일성수 패러다임 갈등, 핍박이냐 재난이냐: 순종에서 희생으로



작금의 주일성수 논란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잔이다. 그러나 신앙적 문제에 합리적 해답을 제공하는 것이 신학이고, 따라서 신학자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글의 결론을 강요할 마음은 없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주일성수주의자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는 주일성수 패러다임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자 한다. 주일예배를 드리자는 사람도 타당성이 있고, 잠시 멈추자는 사람도 타당성이 있다. 문제는 이것이 주일예배를 드리는 당사자들만의 일이 아니고, 논란을 둘러싼 상황도 복잡하다는 것이다.

먼저 한국교회의 일원으로서 나 개인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나 자신이 주일성수를 고수하려고 했고, 내 가족에게 한 가지 신앙 덕목이라도 유산으로 남기고자 강조한 것이 주일성수다. 선교지에서도 여러 고비 가운데서 설교와 예배를 고수하였다. 한편 한국교회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거듭 참회하기 위하여 특별히 본 교단 총회장이 되신 이원영 목사님은 일제 강압하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교회에서 쫓겨나고 목사 면직까지 당했지만, 오지에서 가족과 더불어 예배를 드리면서 믿음을 지켜나갔다.

그런데 이런 사례들은 모두 주일성수의 핍박 패러다임과 관련된 것이고, 우리는 교회사에서 이런 패러다임에 익숙하다. 핍박 중에 주일성수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이럴 경우, 그 핍박은 예배자 당사자에게만 미친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주일성수를 핍박이 아닌 재난 패러다임에서 보기를 요청한다. 이런 상황에서 예배를 드릴 경우, 주일성수는 당사자들만의 종교행위가 아니라, 재난의 또 다른 확산과 대책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후폭풍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핍박은 예배자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에게 미친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주일성수로 인해 그들이 원하지 않은 핍박을 초래할 권리가 있나? 지금 사회는 교회의 종교자유를 침해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공공성을 요청하는 것이다.

성경 역사나 교회사를 볼 때, 예배의 형태나 방식은 다양했고, 예배를 둘러싼 상황도 다양했으며, 주일성수의 양상도 다양했다. 그러나 교회는 항상 새로운 문제 가운데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 왔다.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적어도 두 가지 신학적 질문을 던진다. 첫째, 교회론적 질문이다. 과연 교회는 사회에 있어서 무엇인가? 신약성경에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눅 2:52), 교회(행 2:47), 그리고 교회의 직분자인 장로(딤전 3:7)가 하나님과 사회 모두의 사랑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사태는 교회가 사회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고, 사회로부터 사랑받을 기회이다. 또한 어떤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지를 보여줄 기회이다. 둘째, 예배론적 질문이다. 현재 익숙한 형태의 예배만이 전가의 보도처럼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는가? 지금도 장애인, 노약자 등 주일성수를 할 수 없는 예배자들에 대한 교회의 대책은 완벽하지 않다. 이번 사태로 성큼 다가온 새로운 예배의 도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자. 과연 예배가 무엇이고, 예배공동체가 무엇인지? 교회가 주일아침 모임을 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허약하며, 결속력이 없는 존재인지? 이제 우리는 이번 사태 이후의 교회와 예배에 대해 생각을 모을 때다.

지금 한국교회는 주일성수를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시각에서 사람들을 위한 희생의 시각으로 대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기존 의미의 주일성수를 못하는 사람도, 시민들도 긍휼히 여기자. 부디 이번 사태가 교회의 새로운 갈등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되기를.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안교성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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