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과 시에서 읽는 하나님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과 시에서 읽는 하나님

[ 4인4색 ] 예술작품에 투영된 하나님(1)

김철교 장로
2020년 01월 08일(수) 10:00
블레이크 <아담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1795, 종이에 잉크와 수채, 43.1x53.6 Cm, 테이트 브리턴 갤러리, 런던.
한 송이 작은 풀꽃에서 우주의 신비를, 창조주의 오묘한 손길을 읽어 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홍해를 가르는 구원의 기적들을 믿고,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런 감성을 가장 풍성하게 가진 사람이 예술가라 하겠다. 하나님 말씀은 예술 속에서 가장 잘 빛을 발할 수 있다. 예술은 감성을 통한 사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뇌세포의 아주 적은 분량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이성만 가지고는 무한 광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기에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는 감성의 지원을 받아야 우주의 구석구석, 하나님의 심중까지 헤아릴 수 있다.

개개인의 감성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인간의 의식은 빙산의 일각정도나 될까 극히 일부분만이 삶에 영향을 미치지만 무의식은 인간의 모든 삶을 지배하고 있다. 칼 융은 인간의 무의식을 집단무의식과 개인무의식으로 나누었다. 집단무의식은 아담과 이브 이래로 쌓여 있는 인류의 체험이며, 개인무의식은 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축적된 경험이다.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는 한편으로는 엄격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드러운 감성으로 그림과 시를 통해 하나님을 표현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 의하면 예수님밖에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다. 모세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본 것이라기 보다는 '느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습을 자기 무의식의 지배에 따라 각기 다르게 감성적으로 이해한다. 예술가도, 어린이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는 호랑이 같은 모습을, 어떤 사람은 어린양 같은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어린아이들을 모아놓고 하나님 모습을 그리라고 했더니 그랬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하나님 모습을 달리 그린 것이다.

블레이크가 그린 하나님 모습은 구약에 있음직한 '엄격한 아버지'같은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보면 '어린 양'으로 모습으로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그린,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리턴 갤러리에 있는 '아담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나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옛날부터 계신 하나님'에서는 우리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하나님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의 시 '양'에서는 당시 교육방식이었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를 비판하면서 '새끼 양아, 내가 말해 줄게! / 그분은 너의 이름으로 불린단다 / 스스로 자신을 양이라 하셨기에 / 그분은 온화하고 부드러우시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아마도 블레이크는 자신이 당시의 교육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의 그림에서는 엄하게 표현했지만, 그의 시에서는 새끼 양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우신 분으로 만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하나님을 블레이크의 그림에서 보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느낀다. 블레이크의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이라면, 렘브란트의 그림 속에 있는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이다. 둘 다 모두 우리에게 필요하다. 절제된 사랑, 그것이 참 어렵지만 우리 인간세상에서는 꼭 필요하다.



김철교 장로/배재대 명예교수·영신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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