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시대

분노의 시대

[ 논설위원칼럼 ]

구춘서 목사
2019년 12월 23일(월) 00:00
분노 과잉시대다. 광화문에서 서초동에서 몰려든 군중의 함성이 하늘을 찌른다. 세대 간, 빈부 간, 지역 간, 노사 간 첨예한 긴장이 분노를 부른다. 분노한 군중은 상대를 비난하며 화를 삭이지 못한다. 이들의 분노를 어루만지고 완화시키려는 노력은 어디에도 없다. 도리어 저명인사들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 일반인은 댓글이나 개인 SNS를 통해 분노를 확대재생산한다. 자신이 속한 진영에 따라 성찰 없는 분노가 넘친다. 훗날 역사가들은 오늘 우리 시대를 분노의 시대로 기록하리라. 분노는 이 시대를 관통하는 중심 단어다.

기계문명의 발달은 소통의 도구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소통의 방식은 과거보다 다양해졌다. 우리 조상은 소통을 위해 먼 길을 찾아가야 했다. 먼 거리를 어렵게 찾아간 후 오랫동안 담소를 나누어야 했다. 직접 가기가 여의치 못하는 경우 편지로 소통해야 했다. 반면 오늘날은 메시지가 빛의 속도로 이동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지에게 메시지나 SNS를 통해 소식을 실시간으로 주고받는다. 그러나 이 소통수단의 혁신에도 개인은 역설적으로 더 단절감을 느낀다. 단절된 개인에게 선동의 메시지는 최신 기기를 타고 빠르게 확산된다. 단절은 심화 되고 개인은 더 분노한다. 첨단 현대 문명이 소통의 질을 높여 분노를 감소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분노를 확산시킨다. 소통 혁신 시대의 서글픈 현실이다.

한편 분노는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분노는 부당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도덕적인 저항일 수 있다. 분노는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다. 분노는 나치에 대한 레지스탕스의 저항에서 찾을 수 있다. 분노는 가혹한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삼일 독립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부패하고 무능한 사제에 대한 분노가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죄악에 진노한 하나님은 인류를 쓸어버린 과거의 방식을 바꾸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는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하신다. 분노는 사회변혁과 사회 구원의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동력이다. 분노는 긍정적인 관계 회복의 힘이다.

우리 총회는 더 이상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수치를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우리 교회가 직면한 현실에 대한 거룩한 분노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는 사회에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대우를 가능하게 하는 교회 내부의 현실에 분노해야 한다. 우리 교단은 저항하는 것을 모토로 하는 개신교 정신(Protestantism)에 근거한다. 개신교 정신은 자기비판적 정신이다. 이 비판적 정신에 근거하여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이 분노는 우리에게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의 사역(the work of love)이다. 우리는 수치를 더 이상 당하지 않겠다고 분노해야 한다.

우리는 분노 과잉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혁신을 추동하는 사랑의 사역으로서의 분노는 찾기 어렵다. 우리 총회가 추진하는 실질적인 혁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교회 현실에 대한 깊은 인식에 근거한 분노가 필요하다면 지나친 주장일까? 분노가 주는 현실 변혁의 폭발적 힘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 힘은 아무리 과잉이어도 도리어 부족할 것이다.

구춘서 목사/한일장신대학교 총장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