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인물열전 ] 5. 청렴한 목회자 이자익 목사
김성진 기자 ksj@pckworld.com
2021년 08월 10일(화)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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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시대를 해쳐나갈 방안을 찾기 위해 김제군 금산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제시대를 거쳐 사회적 혼란과 교단 분열이라는 아픈 역사에도 좌절하지 않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열정을 쏟았던 이자익 목사의 삶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30도를 웃도는 7월 말 무더위에 그가 처음 목회했던 금산교회로 향하는 길은 기대가 컸다. 'ㄱ'자 교회로 유명한 금산교회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된 만큼, 한국교회 초기 역사를 배우려는 이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코로나19에도 찾는 이들의 발길은 이어졌다. 금산교회 담임 김종원 목사의 소개로 1905년에 건축된 교회의 역사와 예배당을 둘러볼 수 있었다. "금산교회는 강대상을 중심으로 왼쪽은 여자석, 오른쪽은 남자석"이라고 소개한 김 목사는 "이렇게 남녀의 자리를 구별해 놓은 일은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는 한국인에겐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일은 이들에게 큰 흠이 되었기에 이를 배제하기 위해서 'ㄱ'자로 신축하게 된 것"이라며 'ㄱ'자 교회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곳에서 눈길이 가는 곳은 3층 구조의 교회 내부 강단이었다. "한국 전래의 재단 구조이면서 동시에 '뜰, 성소, 지성소'로 이뤄지는 구약 성막의 3중 구조를 상징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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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교회는 조덕삼, 이자익이 학습을 받는 1905년 10월 11일을 설립일로 정했다. 최의덕 선교사가 마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자익과 조덕삼이 회심을 하고 학습 받은 후, 6개월 후 1906년 5월 마지막 주일에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금산교회가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에 회자되는 이유는 장로 피택되는 과정때문이다. 금산교회는 세례를 받고 2년 후 예배당이 건축될 쯤에 장로를 세우게 됐다. 12살 위인 조덕삼이 먼저 장로로가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지도 않던 이자익이 먼저 장로로 피택됐다. 나이 차이와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이자익이 먼저 장로로 피택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자신의 사랑채에서 예배가 시작됐고 예배당을 건축할 때 자신의 과수원 땅을 기증하며 건축비도 부담했던 조덕삼이었다. 교회 건립과 부흥에도 헌신했고 사회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다. "교회 초창기의 구성원들 대부분 사회의 서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그들이 자신을 대변해줄 사람을 선택할 가능성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떤 분은 조덕삼 장로의 흠결을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흠결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17세에 섬을 떠났던 이자익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기에 혼자 독학을 했다. 젊은 나이에 복음에 대한 열정과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남달랐다. 장로로서의 섬김도 대단했다. 당시 50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전주 선교부에서 개최하는 '달 성경학교'와 '사경회'에 출석해 열정적으로 성경공부를 했다. 1910년, 그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조덕삼은 이자익이 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까지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신학교 5년 과정을 마치고 그는 금산교회의 청빙을 받아 2대 목사로 부임했다.
복음에 사로잡힌 이자익 목사는 큰 교회의 청빙도 마다하며 영화를 따라 사역지를 선택하지 않고 언제나 시골교회를 전전하며 섬겼다. 1924년 9월 13일 함경남도 선창리교회당에서 열린 제13회 총회에서 그 보다 목회에 성공한 목사가 많이 있었지만 총회장으로 당선됐다. 초대 부통령이 된 함태영 목사가 그를 불러 장관직을 제의했을 때, "저는 평생 주의 길을 걷겠다"면서 거부하며 외도하지 않았다. 1947년 2회 남부총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두번째 총회장으로 피선됐다. 시골교회에서 시무한 동사목사가 총회장이 된 사실에 모두 놀랐다.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된 어려운 시기에 총회를 이끄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김수진 목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총회 총대원 여러분, 대단히 죄송하지만 저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사람입니다. 저보다 훌륭한 목사가 많은데 저는 이 자리를 빌려 사양하겠습니다." 새로운 인물들도 많이 있었으며 젊은 일꾼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 무거운 짐이 이자익 목사에게 맡겨졌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제34회 총회장으로 피선됐다.
은퇴 후에 금산에 살던 셋째 아들 집에서 여생을 보내던 그는 1958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삶 뒤에는 숱한 고난과 역경이 있었다. 경남 거창 선교부에서 사역할 때 부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다. 이후에 쌍둥이 딸이 생후 3개월만에 어머니 곁으로 가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욥처럼 끝까지 가혹한 시련을 견디며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섬겼다.
"이 시대의 고민은 이자익 목사의 역할을 이어받아야 할 인물의 부재에 있다"고 말한 대전신대 전 총장 문성모 목사는 이자익 목사를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울이자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을 수 있도록 우리를 격려하는 모델로 비유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회적 혼란과 교회 분열과 갈등, 교회 신뢰도 추락 등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이자익 목사의 삶은 한국교회가 가야할 길을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