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인물열전 ] 4. 성산 장기려 박사
김성진 기자 ksj@pckworld.com
2021년 06월 28일(월)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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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이 남겨놓은 삶의 자리를 찾아 떠난 여정에는 역사신학자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가 동행했다. "전쟁 중인 1950년을 제외하고 1949년과 1951년 부산 인구 통계가 있습니다. 1949년에 비해 1951년 인구는 2~3배 늘어났는데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갑작스런 인구 증가와 함께 부산지역 교회 성장에도 기여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형편이 괜찮은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북에서 피난온 사람들은 돌아갈 곳도 없이 이곳 부산에 남았고 장기려 박사도 실향민으로 이곳에 남게 됐습니다." 6.25전쟁 당시 최대의 피난지였던 부산을 탁 교수는 이렇게 소개했다.
첫 여정은 성산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13년 세워진 장기려박사기념관이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이 경사진 산비탈을 중심으로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하며 정착한 부산 동구 초량동에 자리한 기념관은 접근성이 떨어져 찾는 이들이 많지 않은 듯했다. 흔히 생각했던 기념관과는 조금 생소했던 것은 장기려박사 기념관과 함께 방문자 안내센터와 낙후지역 생활 서비스 개선을 위한 마을지기사무소인 마음나눔방, 한방무료진료소인 건강나눔방, 동화책 작은 도서관, 북카페, 일자리나눔방 등 다양한 공간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성산의 정신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복합 공간이었다.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성산은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시절 김교신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성산은 회고록에서 "김교신, 함석헌, 야나이하라 다다오 등 위대한 크리스찬들의 저서를 접한 후, 현실 속에서 사회를 구원하도록 애써야만 비로소 나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김교신 선생으로 인해 1942년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12일동안 구류된 일도 있었다. "반바지를 입고 무의촌 진료를 나갔다가 잡혔는데 이유는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을 정기구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교신 선생의 '조와'라는 글이 일본의 탄압정치와 조선의 독립을 암시한 글이라는 이유로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김교신 선생이 잡혀갔는데 정기구독자들까지 일제 검거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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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은 가난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해 병이 난 환자에게 "이 환자에게 닭 두마리의 값을 내주시오"라는 처방전을 내리는가 하면, 입원비가 밀린 가난한 농부가 돈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자 손에 차비를 쥐여주고 "병원에선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퇴원 안시켜 줄거요, 밤에 살짝 도망치시오, 문을 열어 놓겠소"라며 병원 뒷문을 열어 도망치도록 도와준 의사였다.
성산은 당시 간 연구에 큰 성과를 남겼던 최고의 의사였다. 한번은 교통사고 환자를 치료한 이유로 당시 럭키화학 구인희 회장와 연결돼 당시 300환(현 1억 5000만원~1억 6000만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간연구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의학계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간을 대량 절제하는 수술을 최초로 성공했던 것. 이 공적을 기려 매년 10월 20일을 간의 날로 제정됐다. 이로 인해 성산은 장영실 지석영과 함께 과학기술인의 전당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으며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평생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의술을 베풀었던 그의 삶은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효시인 청십자의료협동조합 설립으로 꽃을 피웠다. 성산은 56년 '부산모임'을 시작으로 1959년 부산기독의사회를 만들었다. 부산의대 뒤에 있는 한 창고에 수용돼 있는 행려병자들을 보고 시작한 모임이었다. 처음에는 각자가 얼마씩 내어 사람을 하나 두고 약과 식사를 제공하며 보살폈으며 나중에는 복음병원으로 데려와서 정성껏 돌봐주기도 했다. 이것을 계기로 복음병원 문원에서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게 됐다. 성산의 친손자인 장여구 교수는 "할아버지는 피난 시절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료진료를 했는데 결국 병원 운영에 문제가 생겼다"면서 "다음 단계로 모금함을 설치해서 본인이 내고 싶은 만큼 진료비를 내게끔 하다가 그것으로도 한계에 봉착하니까 의료보험제도를 고안했다"고 밝힌 바 있다.
피난 중에 아내와 다섯 아이와 생이별한 후, 평생 북에 남은 아내와 자녀를 잊지 못한 채 재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던 성산. "가족을 북에 남겨두고 남편으로서 또한 아들로서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절망했지만 절망과 고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산의 아픔을 신앙으로 극복했다. 한 번은 남북적십자회담에서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결정된 후, 당시 한완상 총리가 성산을 찾아와 남북가족상봉의 의미를 강조하며 성산에게 가족상봉의 우선권을 주기로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성산은 "저에 대한 과분한 사랑을 감사히 받겠다"면서도 "지금도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오늘도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절박한 분들이 많이 있는데 제가 감히 먼저 만날 수 있겠느냐"며, "나보다 더한 이산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면하면서까지 내 가족을 만날 수 없다"고 의지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양보한 일도 있었다. 결국 가족을 다시 만나지 못한채 1995년 12월 25일 84세의 나이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땅에서 지금 만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짧게 만나느니 차라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만나야지."
우리 시대에 성산을 다시 되짚어 보는 이유에 대해 탁지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순수 복음과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만한 최고의 의술, 그리고 그 재능을 본인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협력해서 미래지향적인 시스템으로 다뤘던 명분 있는 동력, 이것이 장기려 박사의 정신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에게는 천한 사람도 귀한 사람도 없이 누구든 모두가 존귀한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성산은 생명을 지키는 일을 그의 사명으로 알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