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치게 되길"

[ 공감책방 ] 외국인이 기록한 한글 기원의 입문서 '한글의 탄생'

최아론 목사
2020년 10월 12일(월) 07:19
# 모든 사람을 위한 읽기의 탄생

조선이 건국되고 25년이 지난 1418년 세종이 즉위한다. 세종은 즉위 2년 후 집현전을 만들고 20여 년이 지난 뒤에 한글을 창제, 반포한 뒤 1450년 붕어한다. 조선의 건국 후 불과 50년만에 한글은 탄생했다. 한글의 탄생 비화들은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 등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조선의 개국 초기라고 할 수 있는 시절, 최만리 등의 다양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인가?

세종이 한글을 만들기 전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효율적인 시간의 활용을 돕기 위해 서울의 두 곳에 설치했지만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시계를 보고도 시간을 읽지 못했다. 결국 시계 안에 동물의 그림을 표시해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근대 서양의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원근법은 빼놓을 수 없는 도구이자 기술인데, 복잡하게 개발된 기계들을 모사,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다빈치라고 부를 수 있는 세종이 만든 위민(爲民)의 과학의 기술들 또한 전하는 방식의 유무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장영실의 등용에서 볼 수 있듯이 세종은 농업 기술을 위한 천체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까지도 생각했다. 하지만 농업은 보수적인 생산기반이다. 개발과 연구의 성과보다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수용성이다. 어떻게 알리고, 전해줄 것인가?

한자는 생각하는 바를 글로 쓰고 읽기 위해서는 대략 5000~6000자를 알아야 한다. 읽어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모두를 위한 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세종 이전까지 사용했던 구결이라는 형태를 사용해서 한자를 읽어 낸다 하더라도 일상의 용어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한글은 단지 28자이다. 세종이 바랬던 것은 단지 우수한 글자 체계인 한글의 탄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읽기의 탄생이었을 것이다. 그는 읽어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후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라건대 〈정음〉을 보는 자가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치게 되기를"



세종의 의도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한글이 만들어지고 150년이 지난 뒤 조선은 전란에 휩싸인다. 김자현은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에서 전쟁으로 인해 민족의식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한글의 사용을 대표적 근거로 든다. 삼남 지방에서 의병들의 궐기에 가장 주요한 동인은 한글을 통한 전황에 대한 정확한 전파였다. 전쟁의 상황에 대해 읽어낸 사람들은 도망 대신 싸움을 선택했고, 그 결과가 정규군과 전혀 다른 의병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투였다.

노마 히데키의 「한글의 탄생」은 기원을 밝히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책이다. 기원을 밝히려면 원인을 알아야 하고 과정을 설명해야 한다. 하나의 사건이나 형태의 단면을 말하기도 쉽지는 않지만, 시작을 말하는 것은 상상력과 고도의 지적인 훈련을 거쳐야 한다. 낯선 외국인이 기록한 「한글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가장 재미있는 훈민정음 아니 한글의 기원에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학창시절 절대 읽지 않았을 용비어천가나, 최만리와 정인지의 논쟁을 오늘날 인터넷 논쟁보다 재미있게 있을 수 있다. 저자의 의도와 달리 조금 더 딱딱한 책을 원한다면 서울대 교양강의 교수였던 김주원의 「훈민정음」을 손에 들어도 좋겠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후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라건대 '정음'을 보는 자가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치게 되기를"

읽기의 시대가 지나고 보기의 시대가 찾아왔다. 글은 외면당하고 새로운 영상체계는 몇 날 지나지 않아도, 몇 천만의 동의를 쉽게 얻어낸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더라도 한글날, 우리의 읽기의 탄생에 관한 날은 돌아오고 있으니, 기원에 대해서 그 내용에 대해서 어느 한 해 정도는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도 좋겠다.



최아론 목사 / 옥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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