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인을 통해 깨닫는 삶의 의미

[ 기독교문학읽기 ] (23)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

김수중 교수
2020년 10월 14일(수) 10:00
최근에 연평도 해상에서 일어난 공무원 실종 사건은 북한의 총격과 사과로 인해 세계적 관심사가 되었다. 공무원이 월북을 시도했는지 아닌지 그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으나 이 아픔의 근본 원인은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남북 관계가 경색된 지금, 탈북이나 월북 같은 문제는 더욱 민감한 정치적 이슈로 등장하는 모습이 보인다. 지난 7월 어떤 청년 탈북인이 강화도에서 재월북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국방부의 경계작전체계가 도마 위에 올랐고 8월 말에는 자기 어머니를 모셔오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월북했다. 돌아온 25세 탈북인에게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실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어떤 이유가 생기면 남북을 그런 식으로 쉽게 오가기도 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퍼져 나갈수록 탈북인들은 이 땅에서 더 심한 경계 대상이 되고 있다.

'새로운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탈북인들을 '새터민'이라 부르도록 권장하고 있으나 그들이 정녕 한국을 새 터전으로 삼으려면 숱한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이런 일탈들을 탈북인 모두의 행동으로 덧씌우면 안 된다. 그들이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을 이질감과 외로움을 해소해 주기 위한 사회적 관심이 더욱 필요한 요즈음이다. 남북 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대화 통로마저 막힌 상태 속에서 그들의 삶의 터전이 점점 위기 국면으로 향할 것이란 예측은 어렵지 않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 크리스천은 탈북한 이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돌아보는 방편이 된다는 사실을 한 편의 문학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해진(1976~ )의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는 탈북인과 마음의 공존을 모색한 소설이다. 발표된 지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간이 바로 지금인 듯 여겨지는 까닭은 인간적 나눔을 통해 깨닫게 된 삶의 의미란 쉬 사라질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북한을 벗어난 스무 살 청년 로기완은 어머니의 시신을 판 돈 650유로를 품에 안고 브로커를 따라 유럽 땅으로 갔다. 베를린을 거쳐 벨기에의 수도 브뤼쎌에 들어간 그는 그냥 살기 위해 몸부림친다. 로기완이 살아야 하는 절대적 명제는 다만 이것 하나였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쌩미셸 성당 뒷자리에 앉아 기도를 드린다. 임종뿐 아니라 시신마저 지켜주지 못했던 어머니를 위한 기도였다. 지금까지 그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종소리와 자신의 몸이 하나가 되어 울려 퍼지는 듯한 기이한 경험을 한다. 그것은 훗날 로기완의 희망과 사랑, 따뜻한 은인들을 만나 받은 은혜가 하나로 묶어지는 전조 작용이었다.

이 작품의 화자인 '나'는 신에 대한 야속함이나 분노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방송작가이다. 나는 본 적도 없고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는 '이니셜 L'의 기사를 읽고 그 사람의 자취를 따라가며 고독과 슬픔, 그리고 희망을 담아 먼 여정에 오른다. 그런 나에게는 자신의 판단 착오로 인해 종양이 악성 암 덩어리로 바뀌어 버린 소녀 윤주가 가슴에 있다. 소녀가 암 덩어리와 함께 절단해야 했던 오른쪽 귀가 늘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벨기에에서 로기완을 도와준 '박'이라는 의사는 아내의 안락사를 방조한 아픔을 안고 인생을 닫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 존재를 포옹하며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길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살아남은 로기완을 만나게 되는 나,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로는 비록 자기 조국을 버렸으나 북조선이 생지옥이라는 설교는 거부했다. 우리는 불행한 과거를 거쳐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을 보듬어 주어야 할 크리스천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통해 내 가슴의 상처를 치유하며 지옥을 소망의 자리로 바꾸는 노력을 쉬지 않아야 할 이 시대의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김수중 교수/조선대 명예·빛누리교회 목사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