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종교개혁은 꼭 필요했는가?

[ 논쟁을통해본교회사이야기 ] <18>종교개혁의 정당성 논쟁

박경수 교수
2020년 09월 25일(금) 11:16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놓고 서신으로 논쟁을 벌인 사돌레토와 칼뱅.
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필요했는지, 또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두고 16세기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각각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며 수차례 논쟁을 벌였다. 그 가운데 매우 흥미로운 것이 로마가톨릭 추기경 야코포 사돌레토(1477~1547)와 제네바의 교회 개혁자 칼뱅(1509~1564)이 서신을 통해 벌인 논쟁이다.



#제네바의 종교개혁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제네바는 종교적으로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주교좌 아래, 정치적으로는 로마가톨릭 신앙을 고수한 사보이 공작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세력이 서로 결탁하여 제네바의 정치, 사회, 경제, 종교를 좌지우지하며 착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네바 시민들은 주교와 사보이 공작의 동맹체제에 대항하는 혁명을 꿈꿨다. 이들이 그 혁명 이념으로 채택한 것이 바로 16세기 새롭게 등장한 프로테스탄트 신앙이었다. 151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되어 1528년 베른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제네바 시민혁명의 성공으로 1536년 5월 21일 마침내 제네바의 새로운 신앙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이날 제네바 시민들은 지금까지 강요받았던 로마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따라 살 것을 맹세했다. 지금도 제네바의 종교개혁기념조형물에는 1536년 5월 21일이라는 날짜와 '어두움 후의 빛(post tenebras lux)'이라는 종교개혁강령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1536년 프로테스탄트 도시가 되면서 제네바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믿음, 예배, 생활의 기준이 필요했고, 이 첫 개혁 작업의 임무를 떠맡은 사람이 기욤 파렐과 장 칼뱅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신앙의 체계를 세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개혁을 추진하는 파렐과 칼뱅 모두 프랑스인이라는 이유로 토착 제네바 시민들의 반발은 더욱 거셌고, 제네바의 정치·종교적 독립을 지원했던 베른과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결국 두 사람은 1538년 4월 22일 제네바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다. 이후 파렐은 뇌샤텔에 정착했고, 칼뱅은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이렇게 제네바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좌초하자 로마가톨릭교회는 제네바를 다시 끌어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게 됐다. 이런 기대를 갖고 추기경 사돌레토는 1539년 3월 18일 제네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대의를 비판하며 로마가톨릭으로 돌아오라고 설득했다. 제네바에서는 사돌레토의 논리를 반박하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옹호해 줄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고, 결국 스트라스부르에 있던 칼뱅에게 사람을 보내 답신을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망설이던 칼뱅은 1539년 9월 1일 탁월한 필력으로 사돌레토를 논박하는 동시에 교회개혁의 정당성을 논리정연하게 주창했다.



#사돌레토 vs 칼뱅

사돌레토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 고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을 뒤엎고 새로운 것을 도입함으로써 교회의 전통을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교회의 신앙과 전통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결코 잘못될 수 없으며,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에 불순종하거나 그것을 혁신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1500년 전통의 로마가톨릭교회 안에 거하는 것과 고작 25년 전에 새롭게 등장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따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안전하고 구원에 유익이 될지 판단해 보라고 말한다. 소위 개혁자들의 교묘한 언설에 현혹되지 말고 1500년 전통의 로마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의지하고 그 품으로 돌아오라고 강력하게 권한다. 반면 칼뱅은 개혁자들의 주장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성경과 고대교회의 가르침과 유산의 회복이라고 주장한다. 성경과 고대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주님의 몸인 교회 안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괴한 것을 도입한 자들은 실로 로마교황과 그 무리들이라고 응수한다. 사돌레토가 교회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칼뱅은 아무리 교회의 전통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며,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돌레토는 편지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는 그리스도교 정신에서 나오는 사랑과 책임을 배제시키는 가벼운 신뢰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참된 사랑의 실천이 없는 믿음은 반쪽짜리일 뿐이며 위선이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덕 가운데 첫째 자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반면 칼뱅은 개혁자들은 결코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키지 않으며, 사랑의 실천을 우리 믿음의 열매요 표지로 중시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오히려 사랑의 행함을 공덕으로 치환시켜 버린 로마교회의 가르침이야말로 억지라고 비판한다. 칼뱅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선물이지만,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사랑의 행함이 충분한 가치와 권위를 지닌다고 말한다. 중요한 점은 사랑의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원인이나 동기가 아니라, 오히려 의롭게 된 자들의 삶에 나타나는 열매요 결과라는 것이다.

사돌레토의 가장 강력한 비난은 개혁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은 분리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 교회의 일치를 깨고 로마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칼뱅은 로마교회가 먼저 고대교회에서 분리돼 나갔고, 로마교회 안에서는 교회의 표지인 하나님의 말씀과 올바른 성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참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로마교회에서의 분리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칼뱅은 그리스도에게로 가기 위해서 로마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면서, 종교개혁 운동의 불가피성과 정당성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칼뱅은 자신이 말과 행동으로 교회의 일치를 항상 증언해 왔으니, 정말 분리주의자로 비난받아야 할 자가 누구인지 주님께서 판단해 달라고 간구한다.



#칼뱅의 판정승?

1539년 제네바를 두고 사돌레토와 칼뱅이 벌인 종교개혁의 정당성 논쟁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끈 중요한 사건이었다. 특별히 칼뱅은 이 답신으로 인해 프로테스탄트 개혁진영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됐고, 루터도 칼뱅의 이 서신을 "아주 특별한 즐거움으로 읽었다"는 말로 평가했다. 그리고 아마도 1541년 칼뱅이 제네바로 돌아오는 데도 이 답신이 하나의 디딤돌로 작용했을 것이다. 티모디 조지의 평가처럼 "칼뱅의 답변은 문학적 역작으로, 아마도 16세기에 저술된 개혁신앙에 대한 최초의 변호였다."



박경수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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