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는 작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막 4:26-30)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4 어깨에 힘을 빼고 전도지를 돌리자

류호성 교수
2020년 07월 31일(금) 00:00
농부가 풍년을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농부가 성실하고 부지런해야 하며, 둘째는 씨앗이 견실하고 튼튼해야 하며, 셋째는 토양이 비옥하며, 넷째는 필요할 때 비와 햇빛을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 조건들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풍년을 기대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풍요로운 결실의 첫걸음에는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있다. 찬송가 496장의 노랫말처럼 "비가 오는 것과 바람 부는 것을 겁을 내지 말고" 또한 "나지 아니할까 염려하며 심히 애탈지라도" 씨를 뿌리는데서 시작한다. 이러한 점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기회 있을 때마다 '씨뿌림'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다.

먼저 26~29절의 비유를 살펴보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26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과'로 연결되는 것은 27절까지의 문장이다. 곧 '사람이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모른다'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는 대상이 한 단어가 아닌 씨가 성장하는 긴 문장으로 되어 있기에(~ 아래 겨자씨의 비유도 동일), 그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출발점은 '농부가 씨를 뿌렸다'라는 것에 있다. 그런데 농부의 씨뿌림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여러 시도가 있다.

첫째, '뿌렸다'(발레, 26절)라는 동사를 문제 삼는다. 여기서는 3절처럼 '씨를 뿌리다'를 뜻하는 일반적 의미의 동사 '스페이로'가 사용된 것이 아니라. '던지다'라는 '발로'의 과거형이 사용되었다. 곧 농부가 씨를 뿌린 것이 아니라, 무성의하게 여기저기 '던졌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발로'는 씨를 (정성스럽게) '뿌린다' 또는 '심는다'라는 의미로 신약성서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누가는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13:19)에서, '심다'에 '발로'의 단순과거형 '에발렌'을 사용한다.

둘째,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27a)라는 표현을 통해 농부의 게으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지 농부의 게으름과는 무관하다.

셋째,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28a)라는 표현을 통해, 농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비유를 '스스로 열매 맺는 씨의 비유'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과 관계없이 스스로 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이런 해석이 우리의 신앙을 무기력하게 만들기에 조심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도래하지만,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의도하지 않으셨다. 씨가 뿌려지고 열매 맺는 과정을 설명하신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저절로 온다는 것을 의도하셨다면, 자신의 사명이 복음 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또한 십자가도 지실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라는 표현에는 이미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 놓은 농부의 수고가 전제되어 있다. 농부가 땅을 돌보지 않으면 잡초만 무성하다.

이렇게 땅에 씨를 뿌리면, 그 씨는 열매를 맺는다(29). 그래서 '낫'을 대는 추수의 때를 맞이한다. 여기서 '낫을 대다'는 심판의 이미지보다는, 풍성한 수확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비유에 제목을 붙인다면 '땅에 씨를 뿌리는 농부'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바로 이어지는 소위 '겨자씨의 비유'(30~32)에서도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서 '씨뿌림'이 강조된다. 물론 31절에서 겨자씨 한 알이 땅에 "심길 때"라는 표현에는 '뿌리다'를 뜻하는 수동형 '스파레' 동사가 사용되었다. 그래서 농부가 한 알의 겨자씨를 뿌린 것이 아니라, 그 씨가 저절로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마가의 이런 표현은 30절과 연관해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랍비들의 비유 형식을 헬라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31절에서 비유의 대상이 사물인 '겨자씨 한 알'이기에, 수동형 동사가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26절에 등장하는 사람(농부)을 통해서, 그가 '겨자씨'를 뿌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비교, 마 13:31).

1~2mm의 겨자씨 한 알을 농부가 땅에 뿌리면, 그것은 3~5m 높이로 자라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32). 곧 아주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여기서 "공중의 새들"이 알레고리적으로 '이방인들'을 뜻한다는 설명이 있지만, 그것은 적절치 못하다. 차라리 '모든 민족'이라면 모를까!

씨에는 무한한 생명력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의 대추야자 씨를 오늘날에 다시 발화시켰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의 씨를 계속 뿌려야 한다. 전도지 형태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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