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2월 5~10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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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2월 01일(목) 18:12

월-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본문 : 마 16:13~20
찬송 : 80장

2018년도 벌써 1월이 지나가고 2월이 시작된다. 올 한해도 굳건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님에 대한 나의 생각과 마음이 분명해야 하고 확고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가에 따라 예수님에 대한 태도와 행동에 큰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호랑이같이 무서운 선생님이 계셨다. 하루는 반 아이들 몇을 선생님 집으로 초청하셨다. 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쯤 되는 아이가 호랑이 같이 무서운 선생님을 '아빠'하면서 매달리며 무엇인가 사달라고 응석 부리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선생님 앞에 긴장함과 두려움으로 경직된 모습이었지만 아이는 마음껏 응석 부리고 있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태도나 행동에 큰 차이가 날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하다. 예수님을 4대 성인 중의 한 명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을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혁명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을 선지자 중 한 명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것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따르는지 궁금해 하셨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함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이 질문을 던지신 곳은 가이사랴 빌립보이다. 이 지역은 헬몬산 기슭 해발 345m에 위치한 마을로 이 곳 사람들은 대부분 우상숭배자들이었다. 더욱이 헬몬산에는 수많은 우상들의 신전이 모여 있었다. 예수님이 질문을 던진 곳은 오순절의 마가다락방 같은 성령충만한 곳이 아닌 이방 문화와 우상 숭배의 한 복판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진정한 신앙고백이 필요한 것은 세상 한복판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질문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보다 주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누구로 알고 따르는지 주님은 궁금해 하신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어떤 관계이냐는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주님에 대한 나의 고백은 나와 주님의 관계를 보여준다.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교회의 기초가 되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의 능력이 된다. 초대교회의 베드로도 바울도 믿음의 선진들은 많은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확고한 생각과 고백으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았다.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은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있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에 대한 확신과 분명한 고백이 있게 하여주시사, 어느 환경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는 능력있는 신앙인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현구 목사
대야제일교회


화-기이한 일을 보려면
본문 : 수 3:1~6
찬송 : 347장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문제를 만나고 선택을 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로막은 요단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넘어야할 난관이었다. 배 한 척도 없었고 다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원수들이 노려보는 가운데 이런 시련과 난관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제에만 집중하면  문제가 나를 지배하고 짓누른다. 그러므로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문제를 덮을 수 있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신뢰해야 한다. 여기에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앞을 가로막는 요단을 건너갈 수 있을까?
먼저 싯딤에서 떠나야 한다. 본문 1절을 보면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렀다고 했다. 싯딤은 어떤 곳일까? 창세기 14장 10절을 보면 싯딤 골짜기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 곳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역청 구덩이와 같은 것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데 방해가 되는 습관적인 죄와 불신앙과 의심에서 떠나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과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다툼과 분노와 같은 역청 구덩이에서 떠나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믿어야 한다. 본문 3~4절을 보면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2000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라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씀일까? 오직 언약궤를 바라보고 따르라! 내가 너희 앞장서서 가리라. 너희 가는 길은 내가 열리라. 나에게는 어렵고 생소한 길이지만 앞장서서 가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 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또한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한다. 본문 5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을 행하시리라고 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전략이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성결의 문제, 거룩함의 문제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보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우리는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성결하게 해야 한다.
항상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들어서면 요단은 끊어진다. 특히 제사장들처럼 먼저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예비하신다. 그러나 결코 쉬운 여정을 약속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요단을 건너가는 믿음의 결단을 요청하고 있다.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의 바라보는 것이 기이한 일들을 경험하는 첩경이다.

오늘의 기도
언제나 앞장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승리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호민 목사
산정현교회


수-온 가족의 믿음으로 막내를 살리다
본문 : 출 2:1~8
찬송 : 354장

믿음 좋은 총각과 믿음 좋은 처녀가 결혼하여 이남일녀의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가정에 큰 어려움이 찾아왔다. 이 어려움은 부부의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이들이 사는 시대에 악한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아지는 것을 두려워한 바로 왕이 이스라엘의 남자아기를 모두 죽이려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이 젊은 부부는 어린 생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아기를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을지, 내일은, 한 달 뒤에는, 두 달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대책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아기를 먹이고 입히고 키웠다.
이 가족이 석 달을 사는 동안, 밤낮으로 기도했건만 하나님의 응답은 없고 아기는 점점 자라 우는 목소리가 우렁차졌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아기가 점점 자라서 목소리가 우렁차고 건강하게 자라면 그것보다 기쁜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슬프고도 안타까운 현실인 것이다.
믿음의 가정에서는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난다. 부모가 잘못한 것도 아니다. 자녀가 잘못한 것도 아니다. 악한 역사가 일어나는 시대에서 살고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싸움을 싸우면서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 젊은 부부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해서 결국 아기를 버려야만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다. 갈대상자를 만들어 모세를 그 속에 넣을 때, 방수와 안전성을 위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상식과 지식과 정성과 솜씨를 발휘했다. 그렇지만 나일강의 거센 물살 앞에서 그 모든 노력과 수고도 한순간에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겸손히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이 부부와 어린 누나는 아기를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띄워놓고 물결이 출렁거릴 때 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그 위급한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응답의 시간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애굽의 공주가 시녀들과 함께 그 자리에 나타났을 때, 그것이 아기에게 해가 될지, 득이 될지 가늠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붙잡았다. 그랬더니 아기가 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을 붙잡으면 모든 상황이 결국 우리를 위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되는 것이다. 어린 누나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어머니를 공주에게 유모로 소개했다. 하나님께서는 일사천리로 이 가족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셨다.
아침에는 두려움과 눈물로 시작했는데, 저녁에는 기적과 감사로 잔치를 벌이고 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가장 힘든 순간이 바로 기적의 코 앞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늘도 한 번 더 기도하고 한 번 더 찬양하며 믿음으로 나가자.

오늘의 기도
세상은 믿음 좋은 사람을 칭찬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니 끝까지 믿음을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광용 목사
포항믿음교회


목-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다
본문 : 눅 7:11~17
찬송 : 395장

예수께서 나인성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사는 누가복음에만 있는 말씀이다. 이는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예수께서 장차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실 뿐만 아니라 뭇 성도들도 종말에 부활할 것을 예표해 주는 사건이다. 나인은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약 16Km 정도 떨어진 곳이고, 그 부근에는 엘리사가 수넴 여인을 살린 수넴 지방이 위치해 있다. 예수께서 이곳에서 이적을 베푸신 동기는 과부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이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 때문에 이적을 베푸시게 되었다. 즐거움이란 뜻을 가진 나인성에서 과부는 큰 슬픔을 당했다. 즐거워야 할 동네가 큰 슬픔에 싸였다. 동네 이름에 걸맞지 않게 드리운 암울한 슬픔을 거두어 주심으로 기쁨을 회복하게 하시는 이가 예수님이다.
당시 여인은 늘 남자에게 종속되고 보호받는 존재였다. 그런데 의지해야 할 외아들이 죽었으니 사회적 보호막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 과부를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알마나'인데 벙어리를 뜻하기도 한다. 과부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자신을 변호해 줄 사람이 없고, 하소연할 데도 없는 사회적 벙어리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사회적 보호막이 없는 과부는 쉽게 희생양이 되었고, 언제 처참한 상태로 추락할지 몰랐다. 이런 이유로 과부와 고아, 나그네는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여인을 불쌍히 여겨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장례행렬 현장에 친히 찾아 오셨다.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외아들의 죽음과 함께 하루아침에 막막한 처지가 된 과부에게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행렬의 뒤에서 흐느끼는 과부를 찾아가 위로하셨다. 예수님의 첫 번째 관심은 죽은 청년보다 과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죽은 외아들의 시체를 운구하는 장례행렬의 앞으로 가셔서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을 살려 내셨다. 청년이 살아나자 예수님은 곧 가시지 않고 그를 데리고 장례행렬의 맨 뒤에 있는 과부에게 가셔서 넘겨 주셨다.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살리심으로 외아들을 잃음으로 사회적 죽음을 당한 과부를 살려 내셨다. 예수께서는 사회적 약자인 과부에게 그녀에게 생명과도 같은 외아들을 살려내심으로 그녀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새 생명을 주신 것처럼 영원한 사망에 처한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도우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에게 큰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돕는 일을 하셨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늘 등장하는 인물들이 과부 문둥병자 눈먼 자 등이다.
긍휼이 필요한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요 하나님나라의 백성인 우리가 할 일은 지금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다면 하실 일들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친히 찾아 오셔서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긍휼을 본받아, 우리도 소외된 자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허강대 목사
단양교회


금-주일은 복된 날
본문 : 출 20:8~11
찬송 : 43장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제4계명이다.
유대교 랍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그가 그의 저서 '안식'에서 인용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관한 우화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일곱째 날이 하나님께 탄원했다. 첫째부터 여섯째 날까지 모두 짝이 있는데 왜 자신만 홀로 외톨이냐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째 날에게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짝이라고. 그리고 그 말씀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안식일 계명을 주심으로 이뤄졌다.'
안식일이 주일은 아니지만, 장로교 전통은 주일을 안식일과 같이 지킨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 그러므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은 오늘 우리에게 반드시 그 내용과 정신을 기억하며 지켜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정신없이 바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이 분주하게 이뤄질 것을 너무나도 잘 아셨던 것 같다. 안식일을 명하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안식일의 핵심은 '쉼'에 있다. 하나님께서 여섯 날 동안 일 하시고, 일곱째 날 쉬셨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본받아 쉬어야 하는 안식일의 기원이다. 안식일 쉼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중단, 멈춤'이다. 아무리 분주하고 바빠도 하루는 그 모든 것을 중단하고 쉬어야 한다. 중단하고 쉬는 가운데 더욱 집중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모아 집중하는 일이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 그것은 우리 신앙의 근본이다. 분주한 세상 속에서 지치고 상한 몸과 마음을 그대로 계속 세상 속에 두는 것은 내 삶에 대한 혹사이다. 혹사는 필연코 탈진에 이르게 되고,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 속에 두 가지 핵심이 있다. 첫째는 '기억하라'는 명령. 늘 유념하여 잊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둘째는 '거룩하게' 지키는 일이다. '거룩하게'라는 말 속에는 '성혼'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한다. 곧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는 것.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같은 날이라는 의미이다. 주말부부는 무엇을 기대하며 주중의 삶을 살아가는가? 주말에 만나게 될 사랑하는 아내, 남편과의 하루를 소망하며 힘을 내지 않겠는가? 성도에게 주님의 날은 이렇게 기대되는 날이요, 사모하는 날이요, 그러므로 잊지 않고 기다리는 날이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주일을 기다리는 설교자들도 이런 설레임으로 기다려야 할 것이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성도들도 이런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이날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께 집중할 때, 새로운 힘을 얻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온전히 주님으로 인하여 새 힘을 얻어 세상을 이기는 승리하는 신앙의 성도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수 목사
예천교회


토-일한 것이 없어도
본문 : 롬 4:1~8
찬송 : 284장

예수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베드로는 당황하여 예수님께 질문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처럼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며 행동하고 있다. 재물이 많은 한 청년은 예수님을 찾아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한 나머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에 대해서 믿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증명하고자 로마서 4장 본문의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들고 있다.
바울은 먼저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구원함을 받은 것인가? 3절에서 설명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은 것을 의롭다고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만약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4절에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이것을 성경에서는 '행위', 또는 '육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 앞에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의 법에 있다. 그러므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바울은 다윗의 시편 32편 1~2절을 인용해 설명하고 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성경이 말하는 복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주를 위해 일한 것이 없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는 사실이다. 일한 것이 없어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일한 것이 없어도 그들의 이름은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오늘의 기도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해 일한 것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신 의로우신 하나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경희 목사
백향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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