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월 29일~2월 3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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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26일(금) 14:19

월-마음 지키기
본문 : 빌 4:6~7
찬송 : 289장

벌써 2018년의 첫달인 1월이 거의 지나 갔다. 이맘 때면 새해 첫날 마음먹었던 것이 많이 흐트러진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그만큼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 지키기는 단순히 우리의 의지나 결단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마음 지키기는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시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지키기는 우리의 주인 되시는 그분이 우리 마음을 온전히 주장하시게 하는 것, 그것이 본질이다.
바울이 위대한 사도였지만 사역을 하면서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겠는가?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때마다 그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한 것은 세상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었다. 마음이 힘들지 않아서도 아니고, 불평과 불만, 실망, 좌절, 두려움이 안 생겨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생각들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들에게 마음을 뺏기지 않기 위해 남다른 애를 썼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것이 바로 비결이었다. 이것이 단순한 추측이 아닐 수 있는 것은 우선 그러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처럼 그렇게 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사도행전 16장에서는 아예 그 실례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옥문이 열렸는데도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남아서 절망하고 있는 간수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그 가족까지 구원했다. 뿐만 아니라 감옥을 나올 때도 자기들을 구속한 로마 관리들에게 당당하게 할 말을 하면서 나왔다. 그것은 바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평강이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 힘은 틀림없이 한밤중이지만 그들이 했던 그 기도와 찬양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사탄은 교묘하게 우리 마음을 주장하려고 한다. 주님이 원치 않는 마음을 우리에게 집어넣어서 결국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의지를 관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것이다. 우선 주님이 원치 않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영적 경각심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들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바울처럼 온전히 매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 우리 마음 지키기는 우리의 의지와 결단보다 바로 오늘 이 말씀에 달려 있다.

오늘의 기도
주님이 원치 않는 생각과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들이 나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태하 목사
창화교회


화-설교는 짧고 회개는 길다
본문 : 욘 3:1~5, 10
찬송 : 273장

요나는 코미디적 인물이다. 그 특징은 하나님이 부르셔서 가라고 명한 곳과 반대 방향으로 배를 탔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선교를 피하기 위해 가급적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하나님이 처음에 부탁하셨던 것을 행하면서 반대되는 자리에 서 있는 요나를 보며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비범한 행동 이후의 일이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는 선교명령을 들은 요나는 니느웨를 향한 북동쪽으로 향하는 대신 서쪽 다시스로 항해한다. 다시스로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 깨지기 직전까지 위험한 상황에 놓인 것은 하나님의 사람 요나가 그 배의 밑창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나는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다 죽기보다 차라리 자신이 배 위에서 바다로 내던져 풍랑이 멈추는 편을 택했다.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이 자신 때문인줄 이미 알고 있었기 자신을 바다에 내던지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을 확신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 성읍까지 직통으로 갈 큰 물고기를 준비해 놓으셨다. 물고기 뱃속에서 3일동안 있었던 요나는 니느웨 성읍의 바닷가에서 토해낸 물고기에서 나와 니느웨 성읍을 바라보고 서게 되었다.
두 번째로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요나는 니느웨 성읍에서 하루동안 다니면서 그 백성들에게 설교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니느웨 백성들은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은지라." 왕까지도 회개하는 일이 벌어졌다. 요나의 설교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일제히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면서 회개를 했다. 그들을 이토록 변화시키는 요나는 누구였는가? 요나는 관용의 하나님의 말씀이 그 백성들에게 들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전했다. 요나의 설교는 오늘날 설교자들의 설교와 완전히 다르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단, 다섯 마디였다. 니느웨 청중들의 심령을 회개와 금식과 참다운 예배 자리로 이끌어낸 요나의 설교 다섯 마디의 영향력의 근원이 무엇인가?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이 그의 설교를 전하는 동안 설교를 듣지 않고 회개치 않음으로써 하나님이 내리는 심판대 앞에 서기를 원했다.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이방 백성들이 사는 니느웨 도시는 40일이란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았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킬만큼 니느웨 백성들이 일제히 회개하고 죄악에서 돌아서게 한 것은 설교자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설교자 배후에서 말씀하고 있는 심판 하나님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오늘의 기도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켜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문철영 목사
수정교회


수-오순절과 바벨탑
본문 : 행 2:1~13
찬송 : 190장

하나님이 친히 만든 공동체는 교회와 가정, 둘 밖에 없다. 우리가 어떻게 교회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이고, 우리가 어떻게 가정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은 행복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구원과 행복의 비밀을 교회와 가정 안에 숨겨 두셨다. 그래서 이 교회와 가정은 그냥 만들어질 수 없었다. 예수님의 옆구리가 터져 피가 흐른 다음에야 교회가 세워졌고 아담의 옆구리가 터져 갈비뼈가 뽑힌 다음에야 가정이 만들어졌다. 교회와 가정은 소중한 만큼 수고와 희생이 따랐다.그런데 초대교회가 시작된 오순절 사건과 바벨탑 사건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로 같은 '성령 강림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 11:5)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창11:7) 여기서 '자, 우리가'라는 표현은 분명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강림을 말씀하고 있다.
둘째로 '다같이 한 곳에' 모인 공통점이 있다. 오순절 초대 교회는 다같이 한 곳에 모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함으로 시작됐다. 반대로 바벨탑 사건은 다같이 한 곳에 모인 인간들이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다가 오히려 언어가 혼잡하게 되고 온 지면에 흩어진 사건이다. 뭉치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면 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다.
셋째로 '언어와 관계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오순절 사건은 언어가 다른 천하 각국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성령의 역사로 그들의 언어가 서로 소통된 사건이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행 2:8) 불통에서 소통으로의 역사다. 반면에 바벨탑 사건은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던 인간들의 언어가 갑자기 불통하게 된 사건이다. 소통에서 불통으로의 역사다.
오순절과 바벨탑 사건은 여러 공통점이 있는 같은 사건이면서 결과는 정반대인 대비되는 사건이다. 인본주의대 신본주의, 유물론 사상과 유신론 사상의 대결이다. 우리 이름을 내고자 하는 인간 중심주의가 바로 인본주의 사상이고,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 하면 된다'라는 생각이 바로 유물론적 사상이다. 홍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말의 저주를 받았던 인간들에게 오순절 사건은 그 저주가 풀리고 영원한 노아의 방주인 교회가 탄생한 구원의 날이 되었다.

오늘의 기도
다같이 한 곳에 잘 모이는 우리가 되게 하사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는 한 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유영상 목사
사천영락교회


목-다르지만 같은 섬김
본문 : 요 12:1~3
찬송 : 313장

때는 유월절을 엿새 앞둔 날이었다. 예수님의 사역 앞에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는 유대지도자들의 시선을 피하여 제자들과 함께 에브라임 동네에서 휴식을 취하시던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던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했던 베다니의 친구들을 찾아가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남매들을 지극히 사랑하셨다. 감사의 만찬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체포령이 내려진 살벌한 현장과는 아랑곳없이 이곳은 주님을 모시고 아름다운 식탁의 교제가 이어지고 그 가운데 세 남매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주님께 드려지고 있다. 주님 곁에서 우리는 어떤 모양의 봉사자일까?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조명해 보자.
마르다란 이름의 뜻은 '숙녀' 또는 '여주인'이다. 성격은 외향적이고 봉사를 기뻐하는 부지런한 자였다. 가정의 일을 도맡아 했기에 늘 산재해 있는 일들로 인해 마음이 분주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안에 마르다는 이전의 그의 태도를 연상할 수 없다. "마르다는 일을 보고"라고 기록한다. 하나님이 주신 봉사자의 기질 속에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봉사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변화를 경험한 마르다는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이 아니다. 더 이상 분주하지 않으며 불평도 없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 주신 달란트를 아름답게 사용하는 봉사자의 향기를 발하게 되었다.
두번째로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주님께 부어드린 마리아를 만나보자. 마리아는 주님 곁에 있었지만 말씀의 경청을 뛰어넘어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부어 드리는 결단의 행위를 보여준다. 물질의 가치나 사회적 통념이 아닌 죽음의 권세를 거두어 가고 생명을 주신 그 분 앞에 소중한 옥합을 깨뜨렸다. 결과는 그 방안이 향유향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의 주님 섬김은 사랑과 겸손의 최고봉이다. 마리아의 도유사건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신 그분을 위로하는 결과가 되었고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이 되었다. 말씀을 듣는 자로만이 아닌 옥합을 깨뜨려 행동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 순전한 헌신은 그 결과가 우리의 상상을 늘 초월해있다.
셋째, 우리의 섬김의 모습은 어떠한가? 주님의 사랑에 온전한 헌신자의 모습으로 삶을 드리자. 주님이 주인 되심을 고백하자.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우리였음을 인지하고 누구를 탓함이 아닌 그 사랑을 담고 묵묵히 드려지자. 마리아는 가장 귀할 뿐 아니라 여성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전부를 드렸다. 생명이 존재하는 곳에는 자람이 있다. 자라지 않으면 병든 것이다. 복음의 원리는 단순하다. 주님 만난 후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서로 다른 장점들로 섬김의 거름을 삼자. 신앙적 행위와 삶의 결단이 성숙해 가서 온전한 헌신으로 복음의 향기를 꽃피우는 현장을 만들어가자.

오늘의 기도
우리에게 주신 서로 다른 모습들을 인지하고 주님 사랑 입은 자로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주님께 드려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문희 목사
경안소망교회


금-이어받는 복을 받는 성도
본문 : 벧전 3:8~12
찬송 : 436장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녀로서 온갖 은혜와 은총을 받고 사는 것,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을 복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런 복을 받는 비결을 본문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첫째로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다.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들이다. 더불어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은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다. 서로 다른 마음이나 심지어 틀린 마음을 갖고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은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다. 항상 같은 마음을 갖고 살아야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다. 같은 마음이란 서로의 마음을 헤아릴 때 가능해진다. 내 생각 내 주장만 앞세운다면 같은 마음을 갖기 어렵다.
둘째로 같은 마음을 가질 때 생기는 마음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보면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행을 당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모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삶을 사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가진 재물이 많다고 교만하지 않으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며 항상 겸손한 삶을 살며, 주변 사람들에게 잘난 척 하지 않고 도리어 도움이 되는 삶을 살게 될 때 같은 마음을 가진 성도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로 같은 마음을 가진 것이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비는 삶을 살라는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성도를 말한다.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려다 보면 남에게 악을 행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 역시 상대방에게 악한 일을 당할 때도 있다. 그러나 온전한 성도는 도리어 나에게 악을 행한 사람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럴 때 이어받는 복을 받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넷째로 성도란 위의 열거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이런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일을 실천하게 된다.
첫째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성도가 된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나아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소망하는 삶을 말한다. 좋은 날을 본다는 것은 당연히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날, 이 땅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날, 영원한 천국에서의 영생복락을 누리는 삶을 사는 때를 말한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귀는 의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심을 믿고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즉 내가 여러모로 연약한 지체들을 섬기며 살게 되면 주님은 나를 바라봐 주시고 내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신다는 것이다. 즉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은혜와 은총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즉 이어받는 복을 받는 주인공으로 삼아 주신다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어려운 이들을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비는 삶을 살기 위해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성화 목사
유곡교회


토-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본문 : 눅 10:30~37
찬송 : 515장

"여보, 오늘 여탕 분위기는 어땠어요?" 우리 교회 '선한 이웃 사람들'이 운영하는 목욕탕을 수요일은 남자, 화요일과 목요일은 여자들이 이용한다. "생전 처음 목욕탕을 찾았다"는 할머니를 아내가 돕는다. 주민들은 '옥천교회가 우리에게 너무 좋은 일을 한다'고 한 마디씩 한다. 면 소재지에 위치하기에 각 마을에서 오신 분들의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 탈의실과 쉼터. "이제 몸도 씻었으니 마음도 씻고 예수 믿어 천국까지 가야지요"라고 말하지만 아직 교회를 향한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선한 이웃 사람들'이 될 수 있어 하나님도 기뻐하시리라.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이나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있지만 감정의 벽을 넘어야만 이웃이 될 수 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인은 인종에 대한 편견, 유대인을 향한 미운 감정의 벽을 허물고 좋은 이웃이 되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며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다. 또한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의 벽도 넘어야 한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는 촉각을 다투는 시간인데 우리는 자신의 현실을 먼저 생각한다. 지금은 바쁘다는 핑계로, 남에게 도움을 줄만큼 넉넉하지 못하다는 변명으로 도움주기를 주저한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줌으로 강도 만난 사람의 좋은 이웃이 되었다. 우리 교회가 목욕탕을 운영하며 이웃을 섬길 수 있는 것은 넉넉해서가 아니라 일하게 하신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소중한 것까지 나눌 수 있어야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 온 밤을 지내고, 이튿날 돈을 주며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줄 것이요,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약속한다. 여행 중 시간과 물질을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좋은 이웃이다. 옛말에 "천금으로 집을 사고 만금으로 이웃을 산다"고 했다.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좋은 이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으니,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명령이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줄 것이 없어서 돕지 못한 것이 아니라 줄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감정의 벽을 넘고, 자신의 현실과 재물만 아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할 때요, 받은 만큼 나누며 베풀어야 할 때다. 다시 세상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희망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오늘의 기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명령대로 강도 만난 사람처럼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곳곳마다 거룩한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고, 세상에 다시 한 번 희생과 행복의 꿈을 심어줄 수 있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영주 목사
옥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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