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아픔 앞에서 공적 책임 호소

민족의 아픔 앞에서 공적 책임 호소

[ 창간75주년 ] 본보 디지털 아카이브로 본 75년의 사건 사고(상)

한국기독공보
2021년 01월 13일(수) 12:42
교회의 정치적 이용을 경계하는 기사가 실린 1956년 4월 9일자 1면.
1950년대- 전쟁과 냉전, 변혁의 시대

1950년대는 사회는 물론이고 교회와 본보에도 격동기였다. 35년의 식민통치가 끝난지 불과 5년만에 6.25전쟁이 시작돼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까지 1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1948년 집권한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월까지 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지만, 장기 집권을 위한 개헌과 권력 남용이라는 오명을 남기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확대된 미국, 소련 중심의 냉전(Cold war) 흐름 속에 국내에선 반공주의가 득세했으며, 1953년엔 전시 미국의 군사 개입을 허용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1946년 창간한 본보는 1950년 6.25전쟁으로 정간되지만, 1951년 12월 25일 피난지인 부산에서 '기독공보(140호)'로 복간된다. 당시 흩어진 교인들을 모으고 교회를 재건하는데 신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본보는 상처 입고 낙심한 대중에게 복음과 희망을 전했으며, 갈등을 일삼는 사회에 화합과 평화의 소식을 전하고, 미래의 주역인 평신도와 청년들을 격려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기관지로 인수되지만, 10년이 안되는 기간 동안 경영주체가 여섯 번이나 바뀐 것을 보면, 당시 기독교 언론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본보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찾은 6.25전쟁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는 '신사참배 결의 취소 보도'를 꼽을 수 있다. 본보는 195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결의 취소가 6.25전쟁의 고통에서 비롯된 참회였음이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명확하게 밝혀냈다.

휴전 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신사참배 결의 취소는 1954년 4월 26일 이뤄졌다. 당시 교단 총회는 매년 4월에 열려,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했다. 본보를 기관지로 인수한 1954년 제39회 총회는 휴전 후 첫 총회였다. 해방 이후 분단돼 있던 남북 교회가 공식적으로 한자리에 모인 역사의 현장이었으며, 이어지는 민족 수난과 교회 분열로 참담했던 총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자리였다.

7월 휴전 이후 처음으로 열린 4월 총회에서 신사참배결의가 취소됐는데, 흔히 '총회는 9월에 열린다'는 인식 때문에 7월과 4월 사이인 9월에 총회가 열렸을 것으로 오인해, 그동안 6.25전쟁과 신사참배 결의 취소의 연관성엔 무게가 실리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본보의 기록들은 취소 긴급동의로부터 성명이 발표되기까지, 총대들이 직접 겪은 전쟁의 아픔이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선 긍정적인 보도 자세를 취했다. 이 대통령의 장로 피택 기사를 비롯해 교회 방문, 기독교 인사들과의 회동, 기독교와 관련된 입장들을 시시각각 보도해 관련 기사만도 수백 건에 달한다. 반면 선거에 대해선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기독교인들이 자유 의지로 투표에 임할 것을 촉구한다. 1956년 4월 9일자는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면에 '교회는 정치단체 아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교회가 특정 정당에 편승하거나 이용당해선 안 됨을 강조하며, '교인이 국민 자격으로 어떤 정당에 가입하거나 선거운동하는 것까지 금할 수는 없으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회 밖에서 할 것이요 교회를 직접 선거운동에 대상으로 이용할 수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선거 후에도 본보는 대통령과 부통령을 배출한 두 정당이 협력해 환란의 시기를 극복해 낼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한다. 1956년 8월 2일자 사설은 다수를 앞세운 여당의 횡포와 집권을 위한 개헌을 비판하고 있으며, 야당에게도 국민 화합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혼란했던 1950년대 기독교계의 중요한 사건으로 예장 통합과 합동으로의 분열을 빼놓을 수 없다. 1956년 제41회 총회는 에큐메니칼연구위원회를 구성해 연구를 시작하지만, 결과 보고 후에도 논란은 더 확산됐고 분열의 위기감이 조성됐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본보가 독자들에게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1958년 12월 29일자 신문은 에큐메니칼 반대와 세계교회협의회(WCC) 탈퇴 요구에 대한 입장을 내놓는다. 또한 잇따라 그리스도의 증인된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최고의 사명임을 밝히며, WCC에 대한 의혹들을 해명하고 있다. 본보는 분열의 현장인 제44회 총회를 보도한 1959년 10월 5일자 사설에서 교회 혼란의 원인으로 △특정 인간의 우상화 △교권을 잡기 위한 욕심 △당파를 만들고 세력을 키우려는 태도 △사실에 대한 무지를 꼽으며, 후세 기독교인들에게 교단 분열의 교훈을 전하고 있다. 차유진 기자


4.19 관련 기사 일부분이 지워진 1960년 4월 25일자 532호 1면 톱기사.

1960년대- 유혈참사 속 계속된 혼란

우리나라 근현대사 속에서 60년대는 유난히 정치적인 굴곡이 많은 시기였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과 부정부패에 반기를 든 4.19 혁명으로 대통령은 하야했고, 정당의 부패와 위정자들의 비행 속에 이듬해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과 그 정권에 대한 무한한 지지를 보내던 교계와 본보는 1960년 4월 19일 전후에 일어난 유혈사태를 목도하면서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60년 4월 25일자 532호는 1면 톱기사로 4.19 유혈사건에 대한 교계의 반응을 실었다. 하지만 톱기사의 제목과 일부 본문은 판독이 불가능하도록 지워지고 잘려져 나갔다.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담아서라는 추측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잘리지 않은 곳의 기사본문 상태는 지나치게 멀쩡하다.

당시 사태에 대한 교회의 여론을 취재한 기자는 '비상계엄령을 실시한 것은 경찰들만으로는 치안이 유지되지 않음으로 부득이 하여서 한 일일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반대의견을 담으려 했지만 인쇄되지는 못했다. 기자는 글의 말미에 '그러나'라는 접속부사를 붙여 앞의 내용과 상반되는 의견을 썼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내용은 지워진 채 기사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라는 의견을 담으며 끝을 맺고 있다. 지워진 글자 수는 대략 50자 내외다.

4.19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기까지 8일 동안 예장 총회를 비롯한 연합회 등은 호소문, 건의문 등의 이름으로 부정선거를 무효화하고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잘못된 것들을 시정하라는 입장을 쏟아낸다.

그러한 각계의 입장들은 한 주 뒤 5월 2일자(533호) 신문에 여섯 꼭지에 걸쳐 고스란히 실렸다.

총회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호소문에서 학생들의 데모를 '젊은이들의 피끓는 애국심'으로 표현했고, 3.15 정부통령 선거를 무효화하고 민주주의 공명선거를 조속히 실시할 것을 촉구했다. 예장, 기감, 기성, 구세군, 기장 등 5개 교단의 연합체인 한국기교연합회(韓國基敎聯合會)는 대통령에게 드리는 진언인 '건의문'을 보내며, 4.19 학생 데모에 대한 경찰의 지나친 억압과 살상에 대해 심히 유감을 표하며 국민의 불평 요인들을 과감히 시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백낙준, 서병호, 김필례 등이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던 한국기독교학교연합회도 대정부 호소문을 발표하고 "전국을 휩쓸은 청소년 학도들의 평화적 시위운동을 3.1독립운동에 필적하는 역사적 사건임을 인정하라"며 △언론·출판·집회결사·평화적시위 및 학문연구 등 국민의 기본 자유를 실제 보장 등 8개 조항을 나열하며 사회의 모순된 환경을 개선하라고 민족 지도층에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이 사회 전체에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종로 네거리에서 공산당을 외치면서 밀려다니는 시위대들을 제압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을 보고 있던 탓인지 당시 교계는 5.16 군사 쿠테타에 대해 환영하는 입장을 가졌고, 그러한 교회의 입장은 본보의 논지로 그대로 이어졌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후 이튿날부터 교계지도자들은 늦은 밤에도 모여 시국에 대한 긴급회합을 이어갔다. 간담회의 결론은 '군사혁명위원회의 성명은 교회로서 찬성할 내용이며 우리 국가가 민주주의적으로 발전될 것을 크게 기대하며 이에 대한 교회의 힘을 기울일 것을 합의했다"는 내용이었고, 본보는 이를 긍정적으로 보도해 아쉬움을 남겼다.

전쟁과 교단 분열로 혼란과 갈등이 이어지던 시절, 교계와 신문은 5.16 군사혁명을 환영하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내게 된다.

구월산인이란 필명인은 5.16 혁명 직후 실은 칼럼에서 국민상하가 근심에 쌓여졌을 때 5.16 군사혁명을 봤다며, "올 것이 온 감이 들고, 반공 국시(國是)를 선명히 한 것은 한 줄기 서광과 힘을 우리 앞에 준 것"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이때 군사 정부가 추진하는 산업 분야의 경제부흥 정책과 함께 '산업전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분열한 장로교회의 통합을 위한 관심과 노력도 끊임없이 생겼다 소멸해간 것이 기사에 나타난다. 때로는 통합을 주장했다가 때로는 신중을 기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60년대 중반 711호부터 '기독공보'는 지면을 2면에서 4면으로 확장했으며, 산업화 속에 발호하기 시작한 이단 사이비 종파에 대해 폭로하며 그 실상을 알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이 시기의 신문에는 민족을 위한 교회의 책임, 성도들의 건전한 교회생활, 교회 일치운동 등 교회 내적인 뉴스 외에도 민주국가로의 발전, 부강한 조국에 대한 열망 등이 곳곳에 녹아져 있다. 이수진 기자



1970년대- 불평등과 독재에 항거

본보는 1970년 7월 31일 문화공보부의 허락을 받아 '기독공보'에서 '한국기독공보'로 복간됐다. 복간과 동시에 일반 언론에서도 다루지 못한 전태일 분신 사건을 조명하며 한국교회 대표 신문으로서의 존재감을 과감하고 확실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21일 제865호 4면에서 다룬 전태일 분신 사건은 당시 노동자들의 처참한 상황을 생생히 기록했다.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여과 없이 전한 기자는 평화시장에서 발생한 전태일 사건이 남긴 사회적 충격은 한국 교계에 또 다른 문제점을 제시했다고 분석했다. 국내 정세 속 취하기 어려운 객관적이고 명확한 논조를 선보임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사회 문제에 대한 바른 판단을 돕는 예언자적 역할도 충분히 감당했다는 평가다.

취재 기자는 전 씨의 시체가 안장된 성모병원을 직접 찾은 후 모친 이소선 씨가 "아들이 죽음 직전에 '기독교 신자가 자살하면 지옥에 갈 줄 알지만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니 하나님도 내 영혼을 받아주실 겁니다. 내가 죽더라도 어머니는 내가 못 한 일을 해주십시오'라며 울먹였다"고 기록하며 전 씨의 비참한 생애가 신앙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교회가 사회에 눌림 받는 자들을 외면하고, 중산층의 세력과 영합하여 기성체제에 아부할 때 그(전태일)는 홀연히 약자로써 약자의 벗이 되어 산화해 버린 것이라고 필봉을 세워나갔다.

이외에도 본보는 제865호 5면에서도 박청산 회장(한국역사문제연구협회)의 기고문을 통해 전태일 사건을 외면하는 교회의 상황을 지적하기도 했다. 박 회장은 전태일 사건으로 우리 사회 노동문제의 원인을 분석했고, '노동행정당국'과 '교회의 공적 책임'에 따른 한계도 진단했다. 특히 전 씨가 평화시장 분신 후 들것에 싸여 이송되는 순간의 사진을 함께 게재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와 교인들과 같이하고 있겠지마는 헐벗고 굶주린 근로자들이 있는 평화시장에서 눈물 흘리고 있는 모습을 교회와 교인들이 기억하여야 할 것"이라며 "기독교는 산업사회에 눈을 돌리고 연약한 근로자들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야 할 때가 왔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와 곧은 논조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에선 힘을 잃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1972년 10월 평화적 통일을 명분으로 정치체제 개혁을 선언했고, 비상계엄령 선포 후 국민투표로 장기집권을 시작하며 표현의 자유가 점차 억압받는 시기를 겪어야 했다. 이 같은 상황 속 1972년 11월 4일 제959호 1면에 유신헌법안 공고 기사를 게재했으며, 1972년 12월 13일 성탄호에 계엄령 해제에 대해 "국무회의는 해제이유로서 10·17조치가 국민의 절대적 지지 아래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유신체제의 확립에 따라 사회질서회가 평상시대로 회복되었다는 점을 들었다"고 기록하며 정부의 입장만을 전하는 데 급급하기도 했다.

당시 편집국장 고환규 목사가 이 같은 정부의 행태에 비판을 가했고, 불의와 권력에 저항하며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문 발행의 끈은 놓지 않았지만,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과 크리스찬들의 목소리를 더욱 강력히 대변하지 못한 것은 비록 본보만의 아쉬움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본보는 1974년 1월 8일 대통령긴급조치에 대한 교계 인사의 입장을 전하며 다시금 펜의 힘을 발휘했다. 1974년 1월 12일 제1015호 1면 '정치권 속에도 복음 선교' 제하의 기사를 통해 ①대통령긴급조치에 대한 소감 ②정치권 속에 복음선교의 자세 ③교회가 국가에 공헌하는 길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당시 기장 총회 전도부 권영진 총무는 "생각하면 국가적 입장에서나 국민적 입장에서 유감된 일이다. 긴급조치가 틀어졌으면 한다. 종교정신에 투철하게 살고 우리가 공헌하는 길은 선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선교적인 목적이 성취될 때 그것이 국가에 공헌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본보는 지속해서 대통령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목회자들과 관계자들의 명단을 수 차례 게재하기도 했으며 전국 노회가 부활절 헌금을 통해 구속 교역자 가족을 돕는 성금 후원에 대한 기사를 전하기도 했다. 1974년 3월 2일 1022호 1면을 통해 "본사에 기탁한 대통령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김진홍 전도사와 인명진 목사 가족돕기로 기탁해온 새시대선교회의 기탁금 5만 원을 지난 22일엔 인명진 목사부인 김옥란(金玉蘭·28)여사에게와 26일엔 김진홍 전도사 이성덕 여사에게 전달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임성국 기자
미래 향한 예언자적 목소리 높여    본보 디지털 아카이브로 본 75년의 사건 사고(하)    |  2021.01.13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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