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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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책방 ] 은유의 '쓰기의 말들'

최아론 목사
2020년 09월 11일(금) 12:21
# 존재를 찾기 위한 글쓰기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사용하는 언어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통상 모어를 익혀가는 과정, 혹은 배우는 과정은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의 순이다. 외국어가 어려운 이유는 저 순서에 따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어 사용은 어떠한가? 앞의 세 단계 즉 듣고 말하고 읽는 일과 네 번째 쓰는 일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쓰기는 낯선 경험이다. 만남을 위해 카톡에 쓰는 글씨를 쓸 줄 아는 것과 글을 쓰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보통 초등학교 과정중에 일기라는 형식의 쓰기를 배우지만, 그 일기에 대해 은유의 책에서 인용하자면 웃프게도 우리의 일기는 수 없는 '왜냐하면'과 '때문이다'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일기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조차 일기를 쓰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찌보면 우리가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글쓰기는 일기라는 첫 번째 단계에서 종말을 맞이한다. 우리의 언어는, 존재는 쓰기가 없으므로 김광석의 노래처럼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나,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가 된다.

우리가 온전한 언어를, 존재를 찾기 위해 쓰기를 시작한다면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예의 저명한 선생님들의 수업과 첨삭 지도를 통해 배울 수 없다면, 먼저 "나는 글쓰기를 독학으로 배웠다"라고 말하면서,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라고 삶 속의 글쓰기를 가르쳐 주는 은유의 책들을 추천한다.

몇 년전 절판되었다가 최근 다시 출간된 은유 작가의 첫 책 '올드걸의 시집'에서 엄마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을 보자.

"삶이라는 것은 그냥 살아가는 정도였는데, 엄마를 통해 죽음을 가까이서 보고 나니까 '삶'이라는 추상명사가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이어서 은유는 김경주의 시의 일부와 만난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 굳어 있던 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쓰기'

'쓰기의 말들'에서는 사랑과 이별의 말들을 쓰는 일에 대해 폴 오스터의 말을 인용한다. '말이 몸에서 흘러나오고, 그 말들을 종이에 새겨 넣는 과정을 느끼는 것이다. 글쓰기는 촉각적인 면을 갖고 있다. 육체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은유의 말, "좋은 글은 자기 몸을 뚫고 나오고 남의 몸에 스민다."

은유의 쓰기는 희노애락의 삶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정제된 시인의 언어들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은유의 새로운 쓰기는 문장들로 시작해서 자신의 삶의 이야기와 만난다. 은유가 생각하는 쓰기는 삶과 연결된 이야기들을 타인의 시와 문장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일상과 만나는 시들이 경이롭고, 문장들과 만나는 일상들이 빛을 발한다.

은유는 그 뛰어난 글쓰기들 이후에 다시 듣기의 삶으로 들어갔다. 흡사 언어를 다시 배우듯이 말이다. 다시 듣기 시작하자 그의 말이 달라졌다. 그리고 다시 세상을 읽기 시작하고,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 은유는 자신의 쓰기에서 시작해서, 타인들의 삶을 읽어낸다. 고통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말을 대신 쓰는 일을 한다. 그의 최근 작은 우리 사회의 편견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넘어서도록 이끄는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다.

수전 손택은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라고 했다. 매주일 일정의 글을 발표하고 있는 목회자들의 말들이 모호한 것을 분명하게 하고, 굳어 있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하는 쓰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최아론 목사 / 옥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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