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픔 이겨내고 교회와 민족의 동반자로

시대의 아픔 이겨내고 교회와 민족의 동반자로

[ 속간50주년특집 ] 1966년 848호 제작 후 인쇄 중단 … 1970년 제호 변경해 849호 인쇄

한국기독공보
2020년 07월 30일(목) 09:26
1961년 5.16 당일 장도영과 박정희의 모습(좌)과 언론사에 전달된 공보지침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디지털아카이브
# 군사정권 탄압으로 정간 … 3년 10개월 기다려

1946년 1월 17일에 창간된 본보는 근현대사의 질곡과 경영난 속에서도 한국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선도하는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왔다.

그러나 기독공보는 1966년 9월 24일자 848호를 발간한 후 정부에 의해 갑작스러운 정간을 맞게 됐다. 정간 이유는 '시설 미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 정화'를 명분으로 1961년 5월 23일 '포고 제11호'를 내리고 이어 '공보부령 제1호'를 발령했다.

그 내용은 △신문을 발행하려는 자는 신문 제작에 소요되는 제반 인쇄시설을 완비한 자에 한함 △ 통신을 발행하려는 자는 통신 발행에 필요한 송수신시설을 구비하여야 함 △등록사항을 위반한 정기 및 부정기간행물은 이를 취소함 △신규 등록은 당분간 접수치 않음 등이었다.

당시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제2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은 국가권력을 안정으로 재생산하기 위해 경제위기에 대처하고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시민사회의 여론형성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신문 언론이 국가권력의 정당화 과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국가정권의 핵심 과제였다.

결국 1960년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11호'와 이어진 '공보부령 제1호'가 발표되자 일간신문 115개, 통신 308개사, 주간지 487개, 월간지 464개였던 것이 일간신문 39개사, 통신 11개사, 주간지 32개사 등 모두 82개사만이 남게 됐다. 결국 4·19 민주혁명 이후 난립했던 군소 신문과 통신이 정리됐을 뿐 아니라 시설 기준을 명확히 하여 상당한 수준의 경제력을 갖지 못한 자들은 언론사를 경영할 수 없게 했다.

기독공보도 이러한 정부의 언론정책의 기조 속에서 갑작스러운 정간에 직면하게 됐다. 기독공보는 당시 정간에 대한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848호 신문에는 정간에 대한 언급이 없고,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보도와 외부원고의 글들로 채워졌다. 단, 운영위원회가 운영기금을 모집하기 위해 운영위원을 증원하고 시급히 주식을 구성할 것을 이사회에 건의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나와 있어 당시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짐작케 할 뿐이다.

정간 당시 848호 신문은 1966년 9월 22일 개회된 제51회 총회에서 배포되고, 참석한 총대들에게 기독공보가 정간 되었다는 소식이 교단에 알려졌다.

기독공보 정간 후에도 속간을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1968년 9월 속간을 위한 이사회(이사장:김형남, 이사:최창근, 김항복, 이봉수, 정봉탁, 유한섭, 정석복, 사장:김세진)가 조직됐다. 총회도 기독공보 속간을 결의는 했으나 정간된 신문의 속간을 위해서는 시설완비 등 당시 일간지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조건을 내세우는 허가 관청과의 힘겨운 줄다리기가 1년 이상 진행되기도 했다.

속간 준비를 지속한 기독공보 이사회는 기존 제호 사용을 사용할 수 없게 한 규정에 따라 기존 제호를 변경, 1970년 7월 8일 '한국기독공보'를 새 제호로 1970년 7월 31일 849호 속간호를 발행했다. 정간이 된 지 3년 10개월만의 일이었다.
표현모 기자


# '교회와 사회에 희망 전하는 봉사자' 역할 기대

복간호인 1970년 7월 31일자(849호) 신문.
1970년 7월 31일자 속간호를 살펴본다. 1면 우측 상단엔 속간과 함께 등장한 '한국기독공보'라는 새 제호가 눈에 띈다. 이전 제호와 비교하면 기독공보 앞에 '한국'이 붙은 것 외에도 지도 주변 여백에 무궁화 무늬가 들어갔다. 또한 서체가 굵고 힘 있게 바뀌는데 원곡 김기승 장로의 필체다. 김 장로는 속간호 2면에 '생명의 빛'이라는 휘호도 헌정했다.

속간 당시 사무실이 위치했던 한국기독교회관이 1면 사진으로 '종합 메스콤의 꿈이'라는 제목과 함께 등장한다. 지은 지 1년 된 새 건물이었던 한국기독교회관엔 기독교중앙방송, 기독교시청각TV, 기독교사상, 크리스챤라이프 등 언론·출판 기관들이 입주해 있었으며, 총회와 여전도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기독교교육협회, 한국기독교학교연맹도 자리잡고 있었다.

1면 가운데엔 '옳은 손으로 다시 펜을 잡으며'라는 김현승 시인(당시 조선대·숭전대 교수,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의 축시가 들어갔다. 전주 최초의 세례자 중 한사람으로 알려진 김창국 목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다시 잡은 붓이 더러운 황금과 진흙을 성전에서 내어 쫓는 성난 채찍이 되게 하라… 마른 잉크로 십자가의 붉은 피가 되게 하여 어두운 시대에 기적을 보게 하라'고 소망한다.

2~3면에 등장하는 속간사와 바라는 글을 보면 당시 시대 상황 속에 교회와 사회가 본보에 거는 기대를 짐작할 수 있다. 총회장 안광국 목사는 '교단에 기관지가 없어 무수한 고난을 겪었다. 교단의 소식이나 대외적 문제를 다룰 언로가 없었다'고 회고하며, '절망보다는 희망을 전하며 교회와 사회를 위한 봉사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신문이 될 것'을 요청한다. 사장 김세진 목사도 신문의 공익성을 강조하며, 본보가 한국교회 전체 교인들이 경영하고 집필하고 읽는 공기(公器)임을 강조한다.

이어 문화공보부 신범식 장관은 본보와 일반 신문의 다른 점을 언급한다. 그는 본보에 '교회가 갖는 혁신과 사회적 역할을 확대하고, 크리스찬들이 사회 정화와 발전을 도모하게 하는 선구자적 사명이 있다'고 봤다. 또한 대한일보의 주요한 회장도 교회가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을 인정하며, 인쇄를 통한 적극적인 활동을 요청했다. 대한일보는 1960년대 군사정권에 대한 부정적 기사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1973년 폐간됐다.

4면에는 당시 아세아연합신학교 창립을 주도했던 한철하 목사의 글이 실렸다. 그는 '세계사에서는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것을 볼 수 있고, 신문에서는 현시대에 어떻게 행하시는지 볼 수 있다'는 공위량 목사의 말을 인용하며, '신문의 사명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당시 일부 언론이 권력, 금력, 사상 등에 매몰돼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사회 정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당시 주간 신문 중에선 20년이라는 역사가 흔치 않았다. 속간호는 6면엔 '20년의 흔적들'이라는 제목과 함께 6.25전쟁으로 1951년 이전 신문이 대부분 소실됐음을 알리며, 보관중인 1952년 1월 14일자 신문과 속간 전 마지막 신문인 1966년 9월 24일자 신문의 사진을 실었다. 속간호는 12면이지만, 이후 지면은 8면이었고, 당시 신문 한 부 가격은 20원이었다.
차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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