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사람들이 전한 복음, 70년 후 귀한 우정…

흩어진 사람들이 전한 복음, 70년 후 귀한 우정…

[ 아름다운세상 ] 6.25전쟁 당시 대구로 피난간 남대문교회 교인들에 의해 남신교회 설립
70년 지난 25일 남대문교회-남신교회의 연합 수요예배 드리며 감사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20년 06월 25일(목) 17:52
서울역 고가도로 공원에서 포즈를 취한 남대문교회, 남신교회 당회원들. 뒤쪽으로 남대문교회가 보인다.
남대문교회의 대구 피난교회 시절 교인들 사진.
남대문교회 수요예배에서 특송하는 남신교회 장로들.
한국교회의 모(母)교회 남대문교회(손윤탁 목사 시무)는 6.25 전쟁 중에도 남쪽으로 피난을 간 성도들이 대구와 부산에 모여 예배를 드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대구에 모였던 남대문교회의 성도들은 극심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던 피난생활 중에도 예배공동체를 만들어 교제하고, 함께 활발한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전쟁이 끝난 후 남대문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서울로 올라왔지만 그때 함께 드리던 대구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예배당 건물을 세우고 지금까지 목회자 44명을 배출하는 등 대구의 중요한 교회로 성장했다. 그 교회가 바로 남신교회(김광재 목사 시무)다.



# 70년 전 피난 때를 회상하며 함께 예배

6.25 전쟁 70년을 하루 앞둔 지난 24일 저녁 7시30분 서울 남대문교회에서는 대구 남신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함께 참석해 특별한 수요예배가 드려졌다.

두 교회는 6.25 전쟁으로 인한 피난시절 남대문교회 교인들로부터 남신교회가 시작되었다는 특별한 관계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렇다 할 교제가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에서야 두 교회의 목사들이 교회의 과거 역사를 나누고 앞으로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기로 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70년이 되는 올해에는 전 교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19 확진자의 재증가로 인해 대규모 행사를 진행할 수 없게 되자 남신교회 담임목사와 시무장로들이 서울로 올라와 이날 함께 '흩어진 사람들이 전한 복음을 찾아'를 주제로 수요 연합예배를 드리게 된 것.

비록 많은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교인들은 온라인으로 수요예배를 드리며 70년 전 맺었던 두 교회의 인연에 감사하며, 지금까지 건강하게 역사를 이어오게 된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날 예배에서는 특별히 남신교회의 시무장로들이 특송을 준비해 전쟁으로 흩어진 남대문교회 성도들을 통해 대구에 복음이 자라 남신교회로 열매 맺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했다.

이날 예배에서 '박해로 피난 교회 설립' 제하의 설교를 한 대구 남신교회 김광재 목사는 "스데반의 순교와 이어지는 박해로 예루살렘교회가 박해를 받자 이를 피해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복음을 전한 것처럼 남신교회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해 서울을 떠난 신실한 성도들의 예배 처소로 시작됐다"며, "전쟁의 재앙에서 교회를 세워 세상에 빛을 보여 주신 것처럼 70년이 지난 지금 온 세계가 코로나19 재앙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찰하는 기회로 만들자"고 강조했다.

1952년 대구에서의 남대문교회 학생회 창립 기념 사진.
# 환난 중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



양 교회의 중직들은 이날 예배 전부터 만남을 갖고, 세브란스빌딩 역사관에서 과거 남대문교회에 대한 설명을 듣는 등 인근 역사유적지를 탐방하는 시간을 가졌다. 예배 후에 대구 남신교회 방문단과 남대문교회 교인들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이날 만남에서 남대문교회 손윤탁 목사는 "전쟁 가운데 의지할 곳도, 기대할 것도, 해결할 방법도 없을 때 우리 선진들은 함께 모여 예배에 힘썼다. 70년이 지난 지금 흩어진 사람들이 전한 복음을 찾아 온 남신교회가 산 증거"라며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며 교회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돌보아야 하고, 치유와 화해를 위해 일해야 하며, 반목과 불신의 세상을 향해 가르치고, 치유하고, 선포하는 교회의 사명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두 목사는 "남대문교회와 남신교회의 이야기는 비록 6.25 전쟁이라는 엄청난 고난으로 성도들을 흩으셨지만 주님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예배드림으로 복음의 열매가 맺힌 한국교회의 중요한 사례"라며 " 향후 양 교회가 더욱 자주 만남을 갖고 한 뿌리임을 확인하면서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면서 한국교회에 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표현모 기자



남대문교회 담임 손윤탁 목사(왼쪽)와 남신교회 김광재 목사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남대문교회 피난 성도, 대구서 예배 공동체 형성

전쟁 후 대구 교인들 남아 남신교회 예배당 건축해



1950년 겨울 대구로 피난을 내려와 있던 남대문교회의 이재명 집사. 아내와 어린 딸을 데리고 피난을 왔지만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데도 오갈 데 없자 그는 당시 계성학교 교목이던 이운형 목사의 사택을 찾아갔다. 다행히 이운형 목사는 이 피난민 가족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이후 이재명 집사는 대구 서문시장에서 피난 내려온 남대문교회 교인들을 몇 명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교인들의 모임이 형성됐다.

힘든 피난 생활로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해왔던 그들은 "성탄절 예배는 함께 드리자"고 다짐을 했다. 1950년 12월 25일 성탄절. 대구에 피난 온 남대문교회 교인들은 이운형 목사를 설교자로 초빙해 대구시 종로구에 있는 고여위 박사의 집에서 감격적인 첫 성탄절 예배를 드리게 됐다. 이 예배를 계기로 고여위 박사의 집은 자연스럽게 남대문교회 피난 교인들의 연락처 겸 모임 장소가 된 것이다.

이후 대구 피난 교인들은 수시로 모여 성경공부도 하고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하고 외로움을 달랬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난 온 남대문교회 교인들이 더 모이고, 대구 현지인들도 대거 함께 하면서 교인 수가 늘어나게 됐다.

이들은 이제 격식을 갖춘 예배를 드리자는 논의를 하고, 설교목사를 모셔 예배를 드리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51년 10월 19일 이운형 목사를 정식 설교목사로 청빙하고 예배를 드리게 된다. 대구 피난교회는 계속 성장해 개인 가정에서 예배드리기 힘들어지자 적당한 예배장소를 물색하던 중 1952년 6월 25일부터 당시 대구에 와 있던 총회신학교의 교실을 빌려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총회신학교의 교수이고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이기도 한 김치선 목사의 협력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목사인 배명준 목사가 서울의 남대문교회와 대구와 부산의 피난 교회를 오가며 목회했고, 이 가운데 대구 피난 교회 교인들에 대한 심방은 김선경 전도사가 도맡아서 사역했다.

대구 피난 교회는 1953년 가을, 전쟁이 끝나자 배명준 목사와 김선경 전도사가 교회 교인 10여 가정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후 남대문교회의 대구 피난 시절은 끝이 났다. 서울에서 내려온 남대문교회 교인들은 모두 떠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던 대구 피난 교인들은 이운형 목사와 함께 교회재건을 논의하고 성전을 건축하기로 뜻을 모아 대구시 대신동 292번지에 대지를 마련, 1953년 12월 1일에 착공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군 막사의 자재를 싼 값에 구입해 교회 건축에 사용하는 등 많은 우여곡절 끝에 1954년 5월 16일 서울 남대문교회의 '남', 대구 대신동의 '신'자를 합성해 '남신교회'라는 현판을 단 새 예배당 입당예배를 드리게 됐다.
표현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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