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할 수 없는, 여행 할 수 있는

여행 할 수 없는, 여행 할 수 있는

[ 공감책방 ] 피에르 바야르의 '여행하지 않는 곳에 대해 말하는 법'

최아론 목사
2020년 06월 19일(금) 09:00
# "저자의 솔직함은 오히려 몰입의 요소"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2019년 최고의 책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다. 선정 이유를 꼽자면, 표지 디자인이 출간본 이후에 동네책방 에디션, 그리고 바캉스 에디션까지 나온 책은 그 책밖에 없었다. 「여행의 이유」는 유려한 문장들과, 다방면의 잡다한 지식들의 전수, 위기의 상황들을 눙치듯 넘어가는 소설가 특유의 넉살을 보여주며, "내가 김영하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최고라고 추켜세운 이유는 그가 「여행의 이유」를 쓰면서 경험했던 장소들은 나의 여행들과 겹쳐지지 않았지만, 그가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며 말하는 책에 대한 경험은 겹쳐졌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이런 책들을 읽었다면 분명 이 책도 이야기하겠지 라고 생각한 책이 있었다. 바로 피에르 바야르의 「여행하지 않는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다.

피에르 바야르는 파리 8대학의 프랑스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다. 그의 책들은 문학교수답게 수없이 많은 다른 저서들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 출판된 그의 첫 책은 비범한 제목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다. 그의 고백을 인용하자면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기에 이런 저런 책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대부분 그가 펼쳐보지도 않은 책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책들을 (예를 들면 조이스의 「율리시스」) 앞으로도 읽을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저자의 솔직함은 책읽기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몰입의 요소가 된다.

내가 생각하는 그의 최고의 책은 「여행하지 않는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다. 여행에 관한 책을 쓰면서 서문에 여행에 따르는 여러 가지 위험은 충분히 연구되었으니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명제로 시작하며, 서문의 끝에 평생을 쾨니히스베르크에 머물렀던, 그렇지만 세계와 우주를 논했던 칸트에게 마땅히 책을 헌정했다.

책은 「동방견문록」 즉 아시아와 중국에 대한 여행기를 말하면서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가지 않았다는 설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스치듯이, 훑어보듯이 여행하며 배에서 내리지 않는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 이스터 섬에 대한 책을 쓰고 싶어 했으나 건강의 문제로 아내를 보내서 필요한 정보를 받아 책을 기록한 에두아르 글리상, 사모아 섬의 풍속에 대한 책을 냈지만, 관찰대상들과 충분히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다고 비판을 받은 마가렛 미드에 대해서 말한다.

이런 책들을 통해 저자는 여행에 관해, 혹은 한 문화에 관해 말하는 일은 그 장소에 몇 번 갔느냐, 혹은 얼마나 머물렀는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여행과 장소와 사람을 상상하며 의미와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누구나 이야기 할 수 있다고 말한다.

# 가지 않아도 상상하며 의미와 서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최근 몇 년 동안 여행의 열풍 속에 살아왔다. 그리하여 지구상의 모든 곳을 밟아버리겠다는, 아니 그곳의 음식을 먹는 사진을 남기겠다는 의지의 사람들이 되어왔다. 그런데 지금 이시기는 어떤가? 가지 못한다는 이유로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지고 한숨만이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여행하지 않는 곳에 대해 말하는 법」 읽고 나서 생각해보자면, 이런 시기야 말로 진정한 여행의 시절이 찾아온 것이다. 떠날 수 없는 시절에 여행하지 않은 곳들에 대해서 말해보면 어떨까?

사실 목회자들은 매주 그런 여행기를 성도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흡사 아브라함의 곁에 있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과 광야를 걸었던 것처럼, 요나와 함께 큰물고기에 들어가고 니느웨에 갔던 것처럼, 바울의 로마를 향한 여행의 난파선에 함께 한 것처럼 설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번 주일에도 낯선 여행의 동반자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서 말하는 이 땅의 목사님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ps. 슬프게도 김영하의 소개 때문인지 피에르 바야르의 책 중에서 「여행하지 않는 곳에 대해 말하는 법」만이 품절 상태다. 빠른 시일 안에 재간되기를 바래보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말하는 법」을 읽고 나면 책을 읽지 않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아론 목사 / 옥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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