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에 소시지를 먹어도 되는가

사순절에 소시지를 먹어도 되는가

[ 논쟁을통해본교회사이야기 ] <14>사순절 금식 논쟁

박경수 교수
2020년 05월 25일(월) 11:45
루터의 종교개혁이 면벌부를 둘러싼 신학논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사순절 기간에 육식을 해도 괜찮은가'라는 음식논쟁에서 촉발되었다. 이처럼 츠빙글리로부터 시작한 개혁파 종교개혁은 실제적 삶에 직결되는 먹거리 문제에서 출발하여 종교적 관습과 신학 전체에 대한 개혁 요청으로 나아갔다.

개혁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훌드리히 츠빙글리(1484-1531)는 스위스 장크트갈렌 주의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나 베른과 바젤에서 공부하였고 1506년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 후 글라루스와 아인지델른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1519년 취리히 그로스뮌스터의 목회자로 부임하면서부터 로마가톨릭을 비판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운동에 적극 나섰다.



#사순절 소시지 사건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사순절에 고기와 유제품을 금지하는 금식규정을 교회법으로 정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제하였다. 그런데 1522년 사순절에 취리히의 인쇄업자 크리스토프 프로샤우어의 집에서 인쇄 노동자들이 소시지를 먹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인쇄업은 고된 노동이었기 때문에, 프로샤우어는 "금식 기간 중에 육체적으로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에 한해 고기를 먹을 수 있다"라는 예외규정에 근거하여 소시지를 식탁에 내놓은 것이다. 이것이 알려지면서 로마가톨릭교회는 사순절 금식규정을 어긴 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츠빙글리는 1522년 3월 23일 주일설교를 통해 사순절 금식규정은 교회가 정한 인간의 규범일 뿐이며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순절에 육식을 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츠빙글리의 이 설교는 이후 1522년 4월 16일 '자유로운 음식 선택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것이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츠빙글리는 이 책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자유를 옹호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가 법과 규정을 남발하여 가련한 성도들의 양심을 옥죄는 '남용의 죄'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츠빙글리는 사순절 금식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잣대로 판단해야지, 인간이 만든 교회법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약의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의 여러 구절을 근거로 언제든지 자유롭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였다. 동시에 로마교회가 성경에도 없는 금식규정을 만들어 놓고서, 교황에게 돈을 내면 그 기간 중에라도 고기, 버터, 치즈, 우유와 같은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 식용권을 허락한 것은 결국 돈을 벌기 위한 수작일 뿐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츠빙글리의 67개 논제와 해설

사순절 소시지 사건으로 촉발된 츠빙글리와 로마가톨릭 진영 사이의 격돌은 이듬해인 1523년 1월 29일 공개논쟁으로 이어졌다. 취리히 시의회에서 6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벌어진 이 논쟁에서 츠빙글리가 내놓은 것이 바로 67개 논제이다. 그는 지난해 있었던 소시지 사건과 관련해서 "어떤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음식이든 언제든 먹을 수 있다. 따라서 치즈와 버터에 대한 교의는 로마교회의 속임수일 뿐이다."(24번)라고 천명하였다. 츠빙글리는 67개 논제에서 먹거리의 자유뿐만 아니라 교황, 미사, 성인들의 중재, 선행, 성직자들의 축재, 축일과 순례, 수도회, 독신, 출교, 죄 용서, 연옥, 세속 정부 등 다양한 주제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1523년 1월의 공개논쟁이 끝난 후 츠빙글리는 같은 해 7월 자신의 67개 논제를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는 '67개 논제에 대한 해설'을 내놓았다. 이 책은 츠빙글리가 저술한 작품들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 오늘날 일반적인 책의 형태로 500쪽이 넘는 작품을 단 몇 개월 만에 출판했다는 것은 이 작업이 츠빙글리 개혁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고 절박한 과제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츠빙글리는 이 책에서 철저하게 성경중심주의 논리를 펼치고 있는데, 아마도 독자들은 츠빙글리의 방대한 성경 인용과 해박한 성경 지식에 깜짝 놀랄 것이다. 성경은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심장이다. "교회의 검증이 복음의 유효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이 그것을 확증한다."(논제1) 츠빙글리는 또한 복음을 그리스도중심적인 관점으로 해석하여 제시하고 있다. "복음의 핵심과 본질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늘 아버지의 뜻을 계시하셨고, 자신의 무죄함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키셨으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셨다는 것이다."(논제2) 이처럼 츠빙글리는 67개 논제와 그 해설에서 '오직 성경'과 '오직 그리스도'라는 종교개혁의 표어를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다.



#95개 논제 vs 67개 논제

루터의 95개 논제가 독일 종교개혁의 도화선이었다면, 츠빙글리의 67개 논제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신호탄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로마가톨릭의 사제로 서품을 받았지만, 성경의 복음 진리에 근거하여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전향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루터교회라는 전통으로 이어졌다면,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개혁교회라는 열매를 맺었다.

루터의 95개 논제와 츠빙글리의 67개 논제는 외형상으로 볼 때 분명한 차이가 있다. 95개 논제는 라틴어로 씌어진 반면, 67개 논제는 독일어로 작성되었다. 루터가 학자들의 신학토론을 염두에 두고 라틴어로 기록했다면, 츠빙글리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 시의회의 정치지도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논제를 제시했기 때문에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독일어로 썼던 것이다. 츠빙글리는 '67개 논제에 대한 해설' 또한 독일어로 저술하였는데, 이는 취리히의 백성들을 향한 그의 목회적 관심과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95개 논제와 67개 논제는 내용적으로 볼 때도 차이가 있다. 루터의 95개 논제가 면벌부라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한 반면, 츠빙글리의 67개 논제는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주제들을 포괄하여 개혁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95개 논제가 개인의 구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67개 논제는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확장된 관심을 보여준다.

박경수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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