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3.1운동 앞장서 주도한 기독교 지도자들

대구3.1운동 앞장서 주도한 기독교 지도자들

[ 3.1운동100년현장을가다 ] 대구지역 3.1운동 기독교 역사 현장을 가다

이경남 기자 knlee@pckworld.com
2019년 03월 29일(금) 09:24
1919년 대구 3.1운동은 3월 8일 서문외시장에서 거행됐다. 이곳에 모인 독립운동 주동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으며, 주체는 무명의 민(民)들이었다.
1919년 당시 3.1운동 집결지였던 서문외시장 입구에는 대구3.1운동 시작점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지금의 대구 서문시장과는 동떨어진 장소이다.
대구YMCA김영민사무총장과손산문 목사(자천교회)가 독립운동가 배승환 선생의 후손으로부터 최근 전달받은 일기 죽헌연록을 살펴보며 당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있다.
【 대구=이경남 기자】기독교 인사들이 주동적으로 참여한 영남지역 최초의 3.1운동 본거지인 대구를 찾았다.

1919년 2월 24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준비되고 있는 만세운동 소식을 가져온 민족대표 이갑성을 만난 이만집 목사(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교남YMCA회장), 이상백, 백남채 장로(남산정교회, 현 남산교회)는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그런 이만집 목사를 최재화가(후에 목사가 됨) 다그쳤다. 이후 만세운동을 결심한 대구 기독교 인사들은 거사를 주도적으로 준비해 목숨을 걸고 3.1운동에 앞장섰다. 3월 8일 3시경 일어난 '대구 3.1운동'은 이후 영남지역에 3.1운동을 퍼뜨리는 도화점이 됐다.

대구 중구 남성로의 약령시장 골목으로 들어서자 우측에는 이만집 목사가 당시 시무했던 대구제일교회가 좌측에는 교남YMCA회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풍스러운 모습의 교회와 원형 복원이 완료된 YMCA회관을 바라보니 당장이라도 당시 인물들이 거리로 나와 만세운동을 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교남YMCA건물을 반 정도 덮고 있는 장엄한 옛 태극기가 이곳이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알려준다. 교남YMCA 회관 1, 2층에는 대구 3.1운동의 대한 상세한 기록이 인물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대구 삼일운동을 결심한 이만집 목사는 이갑성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네받고 인맥을 동원해 세를 규합한다. 이만집 목사는 김태련 조사, 김영서와 3월 8일 오후 1시 경 서문외시장에서 운동을 개시하기로 하고 백남채 장로(계성학교 교사), 이재인(신명학교 교사), 정재순 장로(신정교회), 정광순(교남YMCA) 등과 비밀리에 모여 기독교인, 기독학교 학생들에게 함께할 것을청한다. 신명여학교 졸업생이자 교사였던 임봉선과 이선애(신명여학교)도 서울과 평양 의거에서 여성들의 활약상을 전해듣고 기독교 학교를 중심으로 참가를 독려했다.

대구YMCA김영민사무총장과손산문 목사(자천교회)가 독립운동가 배승환 선생의 후손으로부터 최근 전달받은 일기 죽헌연록을 살펴보며 당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있다.


대구3.8운동의 두 축, 이만진 목사와 김태련 조사

주일을 피해 거사날이 잡혔다. 3월 8일 토요일 오후 1시 서문외시장. 독립선언서 작성을 맡은 김태련 조사는 맏딸의 혼인을 앞두고 있었지만, 이틀 전인 3월 6일 자택에서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서 100매를 등사하고 사람들에게 나눠줄 태극기 40매를 만들어 자신이 입은 두루마기에 감춰 당일 현장으로 가져간다. 대구고보생들의 합류 시간이 늦어지면서 만세운동은 오후 3시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렇게 대구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도해 진행된 대구 3.8운동에는 십대 청소년인 계성학교 학생(100여 명), 신명여학교 학생(50여 명), 성경학교 학생(20여 명), 일반고인 대구고보생(200여 명)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즉각 합세한 구둣방 주인과 종업원들, 지게꾼, 머슴, 전당포 주인, 술집 종업원 등 무명의 군중들이 대거 참여했다.

독립운동가 이만집 목사
임시로 마련된 단에 오른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조사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지만 곧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김태련 조사를 요주의 인물로 감시해온 일본순사는 집에서부터 그의 뒤를 밟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려 한 김태련 조사를 제지한 것이다. 김태련 조사는 공약 3장만 겨우 낭독할 수 있었다. 그틈에 이만집 목사가 짧은 연설을 한 후'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한다. 태극기 깃대를 앞세운 안경수를 따라 행진한 군중들은 중앙파출소를 지나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에 이르렀으나 이곳에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헌병대에 가로막혔고, 일군경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해산되고 만다.

이날 157명이 피체되고, 76명이 형을 언도받았다. 이만집 목사는 3.1운동의 최고형량인 3년 형을 받았고, 김태련 조사는 2년 6개월의 형, 백남채, 정재순, 김무생 등은 2년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른다. 시위 주동자들 대부분이 검거됐고, 일본쪽에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한 평화시위였다.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대구 지역 삼일운동은 4월 말까지 두달 간 산발적으로 총 6차례나 일어났고, 인근 지역으로 확산돼 경북지역 3.1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역사학자 손산문 목사(자천교회)는 "대구의 3.1운동은 정적인 장터시위와 동적인 가두시위가 결합된 비폭력 평화운동이었고, 일제에 저항의사를 밝히는 목적이 뚜렸했다"고 평가했다. 김태련 조사의 안타까운 가족사도 언급했다. 만세시위에 김태련 조사와 함께 참여한 장남 김용해는 일본군경에게 김태련 조사가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 항의하다가 하수구에 쳐박히고 밟혀서 빈사상태가 된 후 수감되었고, 출옥된 후 20일만에 죽음을 맞았다. 둘째 아들 또한 일본의 지속된 감시와 박해에 시달리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부자가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은 김태련 조사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이만집 목사는 아들 이성해와, 계성학교 교사인 권희윤은 아들 권영화와, 정재순 목사(신정교회)는 아들 정원조와 함께 참여하는 등 기독교 네 가정이 부자가 3.1운동에 참여했고 함께 고초를 겪었다.

김태련 조사.
대구의 3.1운동은 전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 중 기독교인의 참여 비율이 가장 높았으며, 기독교인들이 주동한 독립운동이었다는 데 의미가 크다. 손산문 목사는 "뜻을 함께 한 천도교 지도자는 사전에 구속되어 버렸고, 일반고등학생들은 대구고보가 유일할 정도로 대구 3.1운동은 90% 이상 기독교인이 주도하고 민(民)이 주체가 된 사건"이었다고 설명했다. 타 종교와의 차별성도 언급했다. "천도교와 기독교가 3.1운동노선 방향을 논의 중 천도교 대표는 폭력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나, 기독교가 평화적 비폭력적 운동을 요청해 수용된 결과"라며 기독교계가 3.1운동을 평화운동이 되도록 이끌어 복음의 정신이 구현됐다는 평가도 내렸다.

3.1운동 100주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수의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은 이름도 활약상도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도 조명된 바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국내를 넘어 만주, 연해주, 하와이, 일본 등 해외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디아스포라 신앙인들도 발굴되지 못했다. 민족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목숨을 걸고 신앙을 삶으로 실천한 무명의 크리스찬들이 계속 발굴되어 한 분, 한 분 그들의 고귀한 이름을 불러볼 수 있길 기대한다.



계성고학생들이 서문외시장으로 집결하기 위해 지나간 청라언덕길에는 대구3.1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일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참여한 여성들과 무명의 군중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독립운동 민족운동의 집결지 교남YMCA

현 대구YMCA의 전신이 된 '교남YMCA'는 명칭부터 일본에 대한 저항 정신이 담겨 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일본은 한국 교회를 일본이 좌지우지하기 위해 '일본조합교회'를 통해 한국교회를 합병하려는 시도를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YMCA 또한 일본YMCA에 복속시키려 했다. 1914년 대구에서도 일본은 한발 앞서 '영남기독청년회'를 조직하고 '영남'이란 이름을 선점해 버렸다. 이에 이만집을 비롯한 대구의 기독 지사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일본YMCA가 대구에서 결성되는 것을 위험한 일로 여겨 이에 항거하는 의미로 영남의 또 다른 명칭인 '교남'을 붙여 '교남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초대회장에 이만집 목사, 초대 총무에 김태련 조사를 추대하였으니 바로 지금 대구YMCA의 전신이었다. 이후 '교남YMCA'는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모이는 장소가 되고, 민족운동의 활동거점이 된다. 특히 권서들의 활약상도 두드러졌다. 교남YMCA내 1층 한쪽 공간은 '조선야소교서회'의 분매점(分賣店)으로 지금의 기독교 서점과 같이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신앙서적을 판매하는 일을 담당했던 권서들 또한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다. 그중 배승환 선생은 권서였지만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상해에서도 독립운동을 했다. 그의 권서로서의 독립운동 활약상은 그가 남긴 일기 '죽헌연록'이 최근 후손에 의해 공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대구YMCA는 한국 YMCA 초기 유구한 지방 YMCA 중 하나로서, 사상적으로 열려 있어 에큐메니칼 정신을 갖고 신간회운동, 기독교농촌운동 등을 실시해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독립운동에 앞장섰지만 교회사에서 조명받지 못한 이만집 목사

대구 약전골목에 위치한 대구YMCA 2층에는 독립유공자들의 얼굴 조각인 테라코타가 전시되어 있다. 대구 3.1운동 주동자이자 대구YMCA 초대회장인 이만집 목사의 얼굴을 볼 수 있어 반가웠다. 사실 일제시대 그가 시무했던 대구제일교회에서는 그의 발자취를 찾기 어려웠다. 이만집 목사는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인물이지만, 선교사들의 끊임없는 간섭과 기득권 유지에 항거한 자치교회운동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1920~30년 당시 한국 교회는 반선교사운동, 독립교회운동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선교사의 정신적 지배와 의존로부터 벗어나, 한국교회가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이만집 목사의 걸음에 모두가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이만집 목사는 1923년 경북노회에서 제명된다. 이후 이 목사는 조선예수교봉산교회를 설립하고, 금강산에 수양원을 세워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회자나 형편이 어려운 목회자들을 섬기다 1944년 세상을 떠났다. 경북노회는 2005년 이만집 목사를 복권시켰다. 이만집 목사는 나라의 독립뿐만 아니라, 신앙의 독립도 생각한 시대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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