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돌봄

사랑과 돌봄

[ 현장칼럼 ]

김도현 목사
2018년 07월 09일(월) 10:19
첫 칼럼에서 입양의 본질은 <이별과 상실>이라고 했다. 입양의 또 다른 경험으로써 외면해서 안 되는 부분은 입양부모를 중심으로 하는 경험이다. 그것은 <사랑과 돌봄>이다. 이 또한 입양삼자의 틀 안에서 아울러 내어야 할 소중한 입양의 본질이다.

이 <사랑과 돌봄>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도의 핵심이다. 입양부모들은 입양을 통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사시려는 분들이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는 신앙고백을 삶으로 육화해내시는 분들이다. 동료 기독인으로서 또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이분들의 사랑의 수고에 대해서 존경해마지 않는 바이다.

하지만 이렇게 그분들을 우러러 보는 존경의 시선은, 입양부모들로 하여금 양육의 곤경에 대한 고백이나 나눔, 혹은 부족함과 좌절을 토로할 수 있는 공간을 폐색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82년생 김지영』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82년생 김지영은 사람들이 “아이를 키우는 일이 대견하다거나 위대하다고 하는 말을 정말 듣기 싫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힘들어 하는 것조차 안 될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 정부가 실천해온 <입양은 행복입니다>, <입양은 사랑입니다> 라는 식의 캠페인은 그다지 바람직해보이지 않는다. 일종의 과대광고에 가깝다. 입양이 행복이 아니고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입양은 행복이고 사랑이지만, 동시에 많이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입양가정과 함께 해주셔야 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내보냈다면, 혹시 입양하려는 분들은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시민들의 정서 속에 입양하신 분들에게 어떻게 힘이 되어줄까 하는 마음자리, 입양 아동과 가정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마음이 녹아내리는 마음자리가 마련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분들은, 그럴 경우 입양되지 못한 아이들은 더 많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입양이 요보호아동을 돌보는 탁월한 방법 중의 하나인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허나 입양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세계고아입양운동의 대부인 새들백교회의 릭 웨런 목사가 입양중심 아동 돌봄의 오랜 경험으로부터 점점 성장한 후에 했던 말이 있다. “우리는 입양이 아니고도, 고아를 도울 수 있는 천 가지 방법을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입양만이 유일한 해답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새들백교회에서 르완다에 파송된 선교사이자 입양운동가인 스타이프는 “교회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고아 위기를 끝내기 위해서 우리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나는 화가 납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르완다의 아동 위기 문제를 아동 최선의 이익의 원칙에 기초해서 해결해나가는 유니세프에 대한 그녀의 찬사였다. The Child Catchers의 저자 카트린 조이스는 스타이프의 이와 같은 발언에 대해서, ‘교회입양운동이 아동 최선의 이익보다 자기 봉사적 목표를 더 우위에 두고 자신의 힘을 부패한 입양산업을 돕는데 써왔다.’는 점을 반성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이는 새들백교회가 입양을 넘어 아동 최선의 이익을 실현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숙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사랑과 돌봄>은 혈연 중심적 자기 가족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복음의 걸음이었다. 입양가족에게 가장 가까운 다음 이웃은 누구일까. 아이의 생모(미혼모)와 해외입양인 형제자매들이 아닐까. 그들의 비원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 주는 일이 또 다른 사랑과 돌봄의 길은 아닐까. 또한 '제도의 층위에 사랑과 돌봄의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어 아동의 인권과 최선의 이익이 실현되도록 하는 일'에까지 걸음을 내디디고 경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인권을 아우르는 사랑과 돌봄의 정신에 기초해서 설계되고 작동하게 하는 일 역시 복음의 일이 아닐까.

김도현 목사/뿌리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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