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다

훈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다

[ 목양칼럼 ]

손미애 목사
2018년 07월 13일(금) 10:33
얼마전 교회에서 청년들이 모여 '지금껏 들은 말 중 최악의 말이 무엇이었나'를 주제로 대화하는 것을 지켜 본 적이 있다.

여러 이야기 중 가장 공감을 얻은 발언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인데'로 시작되는 모든 말들요"였다. 이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청년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크게 호응했다.

비단 청년들뿐이랴! 지도와 훈계란 이름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날의 모임을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 삶을 가장 크게 바꿨던 성령님의 음성이 불현듯 떠올랐다. 신대원을 졸업한 후 전도사 시절, 별 의지 없이 아프리카 단기선교에 참여했던 때였다. 사역에서도 삶에서도 목표가 없이 막연히 시간만 보내던 때였다.

"정말 넌 가능성 없는 인간이구나. 아프리카까지 와서 사막을 보면서도 사막과 같이 가능성 전혀없는 네 자신은 보지 못하는구나!"

까만 아프리카의 밤 하늘 아래서 내 일생 가장 강력하게 내 본질을 짚어내시는 내적 음성을 들었다. 신기한건 그때부터 내 삶의 방황이 그치고 오래된 우울함과 불안감 두려움들이 치료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로서 나의 전적인 가능성 없음과 그로인해 얻게 되는 십자가의 능력이 깨달아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뼈아픈 말을 가장 많이 해주시는 분은 언제나 성령님이셨다. 어느날 문득 나는 왜 나를 훈계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에는 상처를 받지 않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내가 찾은 답은 그분의 사랑이었다. 성령님의 강력한 책망에는 언제나 그 안에 나를 향해 넘치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사회에선 듣기 싫은 말은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대화의 주된 기술이다. 그런데 목회현장에서도 이것이 미덕으로 자리잡아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듣기 싫은 말을 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는가에 따라 대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교양있고 매끄러운 대화의 기술이 아닌 아버지의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기술이 오히려 내 안에 더 자라나길 기도해본다.

손미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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