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종소리를 찾아 떠난 독립운동 현장

교회 종소리를 찾아 떠난 독립운동 현장

[ 3.1운동100년-현장을 가다 ] 안동지역 3.1운동 기독교 역사 현장을 가다

김성진 기자 ksj@pckworld.com
2018년 06월 27일(수) 10:00
안동 첫 만세운동 출발지.
교회 종소리를 찾아 떠난 역사 현장



【 안동=김성진 기자】1919년 3월 13일. 그 날은 유림의 본고장 안동에 장이 열리는 날이지만 예사롭지 않은 장날이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 만세운동의 소식이 이곳 안동에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이 날은 안동 시내에서도 안동교회 종소리에 맞춰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어김없이 교회 종소리가 안동 시내에 울려 퍼졌지만 예정됐던 만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밀리에 진행되던 만세시위 계획이 일제 당국에 발각된 것이다. 만세시위를 계획했던 안동교회 김영옥 목사와 김병우 장로는 비통하게도 유치장 안에서 교회 종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오대교회 교인 출석부.
'독립만세'를 한 번 외쳐보지도 못하고 끝날 줄 알았던 만세시위는 한 명의 교인을 통해 다시 불씨가 되살아났다. 그가 바로 1909년 쪽복음을 접하고 포산교회를 설립한 후 1917년 경북노회에서 조사로 임명된 이상동이었다. 그는 당시 안동 중심가인 공신상회(현재 신한은행 앞 거리) 앞에서 태극기를 모방한 연에다 '대한독립만세'를 쓰고 혼자 만세시위를 벌였다. 비록 그 자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지만 그의 이름은 안동 지역에서 첫 만세시위자로 기록됐다.

첫 만세시위자 이상동은 대한민국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동생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언급했던 이상룡은 1911년 안동에서 유명한 임청각과 99채 칸 집을 처분한 뒤, 가솔 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암울한 일제 시대에 두 형제는 목숨을 내놓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물론 이상동 조사의 아들 이운형도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3.1만세시위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

지역 교회사가인 와룡교회 강정구 목사의 도움을 받아 기자가 첫 만세시위를 벌였던 안동 시내 장터를 찾았을 때, 100년 이라는 세월 때문인지 당시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중심가로 변한 첫 만세시위 현장엔 은행과 상점들만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첫 만세시위 현장이라는 표지석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3.1운동 역사를 연구하는 강 목사는 만세시위의 불씨를 지폈던 이상동을 시작으로 1919년 당시 안동 군에 세워져 있던 25개 교회 중에서 11개 교회(안동 예안 오대 마동 방잠 방하 동교 녹전 명동 풍산 국곡교회) 39명의 교인이 3.1운동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고 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자 외로이 안동 시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던 이상동 조사는 비록 체포된 후, 경성감옥에 수감돼 옥살이를 했지만 그의 조국 사랑과 신앙은 이후에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가 경성감옥에 수감 중이었을 때다.그곳에서 함께 수감 중이던 이중무 이원영 이운호 이맹호를 만났다. 그는 복음을 전했고 그 곳에서 회심한 4명 중에 한 명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회 총회 총회장을 지냈고 제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결의 취소성명을 발표한 이원영이었다. 1920년 이들이 출옥한 후, 섬촌교회를 설립하는데 섬촌교회의 출발이 곧 3.1만세운동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섬촌교회의 터를 찾기가 어렵지만 당시에 섬촌교회는 배우지 못한 이들을 위한 야학과 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퇴계 후손인 진성 이씨들이 "상놈이 글을 알면 양반이 양반 노릇 할 수 없다"며 교회를 핍박했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1937년 노회 보고에 따르면 당시 교역자는 이중무였는데 그는 이상동과 함께 경성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복음을 전해들은 4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안동지역의 만세시위는 대부분 장날에 맞춰 안동 시내(13일 장날 1인 시위)를 시작으로 예안 장날(17일)과 임동 장날(20일), 임하 장날(20일), 풍산 장날(23일) 등 크게 5개 지역으로 나눠 진행됐다. 1인 시위로 주춤했던 안동의 만세시위는 3월 20일이 되면서 더욱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임동면 챗거리 시장과 임하면 신덕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가장 격렬했다. 당시 동교교회 교인들은 만세시위에 많이 가담했고 그 중에 3명이 감옥에 끌려가 2명이 옥사했다. 감옥에서 옥사한 두 명 중 유연성은 안동의 3.1만세운동으로 재판을 받은 사람 중에 최고령인 7년 형을 언도받았다.

오후 3시경, 길안면에서도 시위가 극렬하게 펼쳐졌다. 이곳에는 기독교가 중심이 됐고 그 중심에 오대교회가 있었다. 수백 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짖던 만세시위대는 면장과 서기를 동참시키기 위해 면사무소로 갔지만 일본 경찰이 저지하면서 본격적인 투석전이 시작됐다. 면사무소 유리창과 출입문은 파괴됐고 다시 길안 주재소로 몰려가 유리창과 기물을 파괴하는 중에 일본 경찰의 발포가 시작됐다. 오대교회 손두원과 김필락은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피살됐고 손영학과 김정익 김정연은 일본 경찰을 피해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려다가 체포돼 감옥에 들어갔다. 정성흠 김술병 김재락 권우철 권영직 정유복 장두희도 감옥에 끌려가는 등 교인들이 만세시위로 고초를 당했다.

기자는 안동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임하면에 자리한 오대교회를 찾아 당시의 상황을 듣기로 했다. 오대교회를 찾은 기자에게 장봉환 목사는 귀중한 교회 역사자료를 보여줬다. 1908년부터 작성된 교인들의 헌금 명단인 '별연보기'와 1911년부터 작성된 교인들의 '출석부', 그리고 1909년 오대교회가 노회와 블라디보스톡에 파송된 선교사를 위해 헌금한 명부인 '노회와 해삼위 전도 별연보'였다. 이 자료는 당시 교인들의 명단을 통해 3.1만세시위에 참여한 자의 명단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 자료였다. 100년 이 지난 역사적인 교회 자료를 지금까지 간직한 것도 놀랐지만 그 자료에 기록된 구체적인 내용은 교회사를 연구하는데 귀한 자료라는 생각이 들었다.유림의 고장 안동은 한국 독립운동의 발상지로도 손꼽힌다. 그 중에서도 3.1운동 때 기독교의 역할은 안동 지역의 독립운동에 빼놓을 수 없다. 이 민족의 가슴속에 맺힌 독립에 대한 꿈과 열망은 결코 꺼질 수 없었고 1919년 3.1운동 당시 교회는 이 나라의 고통에 동참하며 민족의 희망으로 자리매김했다. 교회 종탑에서 울려퍼진 종소리는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대에 독립에 대한 희망의 소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짧은 일정이지만 서울로 되돌아오는 기자의 귓가에는 독립을 위해 목놓아 외치던 만세 소리가 떠나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이미 교회 종소리가 사라진 한국교회는 언제쯤 다시 이 사회를 향해 종소리를 울릴 수 있을지…. 마지막으로 함께 동행하며 현장을 소개하고 자료를 제공한 와룡교회 강정구 목사의 도움은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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