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적 칼뱅주의에서 전투적 근본주의로

포용적 칼뱅주의에서 전투적 근본주의로

[ 6월특집 ] 한국교회사에서 본 장신신학

김성진 기자 ksj@pckworld.com
2018년 06월 04일(월) 09:48
특집 주제 - '장신신학'의 현주소를 말하다

한국교회사에서 본 장신신학



해방 이전 장신 신학은 초기의 포용적이고 통합적인 칼뱅주의에서 1920년대 반기독교 운동에 대항하는 과도기에 적절한 성찰과 반응의 기회를 놓치면서 1930년대에 전투적인 근본주의로 전환되었다.



개교 이전 온건한 칼뱅주의 도입

선교사들은 1880년대 선교 초기부터 온건한 포용적 칼뱅주의를 소개하고 가르쳤다. 1893년부터 칼뱅주의 정치를 사용하는 장로교회 설립에 착수했다. 1888년에 시작한 조사사경회에서부터 정통 칼뱅주의와 동아시아 비교종교학을 가르쳤고, 조사사경회가 발전하여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언더우드 중심의 서울과 마페트 중심의 평양의 신학 차이가 1890년대부터 드러나 1930년대까지 지속되면서 해방 이후 교단 분열까지 영향을 주었다. 서울(언더우드) 대 평양(마페트)의 신학적 차이 규명이 초기 장신신학의 계보를 파악하는 관건이다. 1910년대까지 다양한 칼뱅주의가 소개되어 공존하면서 변화하는 한국 상황에 적절한 신학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토론한 정신을 배우고 토론 과정에서 제기된 신학적 주제들을 복기해야 할 것이다.



1910년대까지 보수적 칼뱅주의 발전

1902년 신학교 초기부터 칼뱅주의로 교육했다. 장신 창립기의 신학은 16~17세기 개혁주의 전통신학을 기초로, 18~19세기 경건주의와 부흥주의를 수용한 영미 복음주의를 교과서로 삼고, 19세기 후반 중국 기독교가 생산한 한문 서적을 필독서로 삼아 한국의 종교문화 상황에 맞는 변증론으로 보완하는 삼중 구조를 유지했다. 1901년부터 공의회를 통해 한국인 지도자를 장로회 정치로 훈련하여 1907년 독노회를 설립하고 자치로 나아갔다. 1907년 대부흥으로 웨슬리안 알미니안주의가 들어왔으나, 부흥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에는 온도 차이가 있었다. 감리회 측에서도 부흥 운동은 소위 신비파인 남감리회 선교사들이 주도했으며, 평양 장로회 안에서도 마페트와 베어드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페트는 매코믹신학교와 프린스턴신학교의 신구학파와 구프린스턴신학을 조화시켜 칼뱅주의의 균형을 유지했다. 1907년 독노회의 12신조는 웨스트민스터 문서와 공존하면서 아시아신학을 준비하는 기초였다. 헌법의 일부 조항은 회중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회주의가 강조 되었는데, 당시에는 필요한 조항이었으나, 1920년대 교회 조직화가 진행되면서 건강한 회중주의까지 억압하는 권위주의 조항이 될 수도 있었다.1910년대 신학교와 선교사들의 신학적 보수화에 비해 서북 기독교인들은 복음주의가 가진 사회개혁적 행동주의를 105인 사건이나 삼일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키는 기독교 민족주의를 유지했다. 1910년대 일본조합교회로부터 유입되는 성서고등비평과 자유주의신학에 대하여 서울과 평양이 동일하게 대항했다. 1919년 브라운 총무가 평양 선교사들을 보수주의자요 엄격한 도덕주의자라고 비판한 이유는 대학문제에 걸린 그의 진보적인 교육 신학과 친일적 태도에 기인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1916년 신학교 요람의 교과과정은 1902년 교과과정과 유사했다. 1900~10년대 신학을 소개하지 않으면서 신학교는 그 보수성으로 인해 1920년대에 위기에 처하게 된다. 1910년대 자유주의 신학을 담은 일본어 신학 서적이 유입되면서 신구 세대 갈등이 예견되었다.



1920년대 사회주의와 갈등하면서 위기에 처한 전환

1920년 중반에 격화된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에 대항하여, 평양 기독교는 '조선의 예루살렘' 담화와 순교자 토마스 만들기 운동을 전개했다. 신학생의 학력이 올라가고 평균 나이가 과거 40세에서 30세 부근으로 내려가면서, 조사와 장로의 수가 점차 줄고 영수나 무직분자가 늘었다. 성서 해석은 한문 선교대회주석에 의존하면서, 전통적인 복음주의 노선을 유지했다. 유기적 영감설을 지지하고, 성경 각 권의 비중을 다르게 보고 문체와 양식에 따른 차별적 해석을 지지했다. 종말론은 초반에 천년왕국전재림설에 경도되었으나 후반에 균형을 잡았다. 종교론은 19세기 말 구프린스턴 신학의 타종교론을 유지하다가 20년대 후반에는 이방종교 비판을 강화했다. 1927년 "종교변호선언"으로 근본주의 5대 강령을 수용했다. 전통 칼뱅주의를 보수하기 위해 배타적이고 전투적인 근본주의가 1920년대 중반에 평양과 신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교회 분쟁과 반선교사 운동은 제도화되고 기성교회로 가는 노회주의에 대하는 회중주의 교회론의 긍정적 기능과, '의무 잃은 교인'의 양상, 교회 분열, 이단 발호의 부정적 기능을 드러내었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세습과 가나안성도 문제와 유사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추후 연구가 필요한 주제들이다.



1930년대 전투적 근본주의 정착

1930년대 보수적 칼뱅주의는 전투적 근본주의로 불완전변태를 이룬다. 초기 성령의 능력으로 유지했던 신학적 유연성을 상실하고 미국 근본주의의 영향으로 공격적인 근본주의가 자리잡았다. 근본주의가 고착되는 과정에서 레널즈가 중국 근본주의 신학자 챠유밍의 '신도학'을 번역하여 신학교 교과서로 삼은 것과 박형룡의 배타적 종교론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박형룡은 전통적 칼뱅주의로 신칼뱅주의인 바르트 신학을 배척했다. 이것이 1940년대 조선신학교 분리와 1950년대 한신의 분립을 낳았다. 1934년 희년 때 교회 지도자들은 기념행사로 승리주의에 도취했으나, 상세한 통계를 바탕으로 김택민은 교회의 유물화와 대형화를 비판했다.



미래를 위한 과제를 몇 가지 제시한다.첫째 과제는 역사적 자료에 근거한 신학적 상상력의 창조이다. 해방 이전 초기의 신학은 개혁주의, 복음주의, 근본주 의, 신칼뱅주의라는 여러 신학 조류의 흐름과 스코틀랜드 미국 캐나다 호주 장로회와 중국 기독교와 한국 종교 문화가 만나 형성되었다. 과거는 외국처럼 낯선 공간과 같고 미래처럼 유동적인 시간이다. 그 시공간에 들어가 신학 지형의 계보를 만들고 전체 이야기를 보여주는 지도를 그리면서 통합적인 신학적 상상력을 키우는 것이 첫 과제이다.

해방 이전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종교론이었다. 신학(변증론)과 비교 종교학(험증론)은 유물론, 휴머니즘, 진화론, 종교다원주의의 도전에 대답하는 신학이다. 1920년대 신지식과 신사상으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을 때, 신학교는 정체성과 적합성의 긴장 속에서 온유하게 응답하는 신학적 자세를 상실했다. 그 결과는 신학의 경직과 교인의 유출과 교회 분쟁을 낳았다. 1980년대 이후 반종교론과 1990년대 이후의 종교다원론이나 2020년대 북한선교의 과제를 보더라도, 현재 가장 중요한 신학 작업은 '종교론'이다. 장신신학에 타종교신학, 종교철학, 비교종교학 연구와 강의가 시급하다.

미국 장로회 선교사들이 가져온 19세기 말 복음주의적 칼뱅주의에는 18세기 노예해방을 추구한 개혁적 행동주의가 살아있었다. 이 칼뱅주의가 선교지에 전달될 때 왜곡이 발생했다. 행동주의라는 물건을 싣고 온 수단이 선교운동이었다. 이 기선을 타고 온 선교사들과 그것을 본 일부 한국인들은 화물인 행동주의보다 기선인 선교운동에 더 관심을 가졌다. 행동주의가 태평양을 건너기 위해서는 선교운동이 필요했으나, 한국에서는 후자의 비중이 전자를 점차 능가하게 되었다.

1919년까지 한국장로교회에는 사회개혁 신앙이 유지되었다. 복음의 짐을 풀어서 한국 상황에 맞는 반봉건 근대주의와 항일 민족주의 성격을 유지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 네비어스 정책을 유지하면서 선교운동 자체를 행동주의로 이해하면서, 사회개혁은 사라지고 교회 설립과 선교 운동의 확대 재생산이 주류를 차지했다. 그것이 1920년대에는 평양의 예루살렘화로, 1930년대는 희년의 승리주의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에는 공격적 해외선교운동과 대형교회운동으로 변질되었다. 이 교회성장주의가 선교지로 갈 때 그 비행기 화물 안에는 사회개혁 신학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서북 기독교가 지켜온 행동주의의 다른 흐름은 해방 이후 건국 세력으로 성장하여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는 세력도 만들었다. 따라서 후자의 전통을 연구하고 계승하는 노력을 장신의 세 번째 과제로 제시한다.



옥성득 교수(미 UC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