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주일을 보내면서

성령강림주일을 보내면서

[ 주간논단 ]

안옥섭 장로
2018년 06월 05일(화) 10:00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후 두 가지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당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던 각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향 언어를 듣게 되는 일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이 방언을 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방언이 성령 강림을 통해 이뤄졌음을 보게 된다. 다만 요즘 접하는 일부 방언과는 다른 점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성령 강림과 방언의 은사의 연관성에 방점이 찍히는게 아니라, 방언으로 인해 전세계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됨으로써 성령 강림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사도행전 2장 11절을 보면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밝힌 그 모습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행적과 그 역사를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를 넘어서서 전 세계를 향하는 보편적 복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들이 공회에 넘겨지게 되는 계기가 된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자를 일으켜 세운 사건이다.

사도행전 3장 1~10절엔 '본다'는 동사가 네 번 등장한다. 성령 강림의 특징은 바로 이 주목하여 봄에 있다.

일상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들인 잃어버린 자, 소외된 자, 억압받던 자들에 대해 주목함으로써 그들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모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 있던 자는 일상의 관점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당시의 성전 예배의 모습에서 제외된 자였다. 성전에 올라가는 이들에게서 구제금을 요구하는 그런 자였다. 그러나 성령의 시선으로 주목하여 보니 그는 더 이상 앉은뱅이가 아니었다. 그도 서기도 하고 뛸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성전에 올라가 함께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 즉 성령 강림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라는 복음성가 구절이 떠오른다. 이처럼 기독교는 새로운 변화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로부터 수구, 근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성전 앞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있던 자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의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성령의 운동을 기억해 내고, 편견과 아집을 성경의 진리로 왜곡하지 않고, 지속적인 자기성찰과 통찰력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찾아 떠나는 선교의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땅끝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안옥섭 장로

전국 장로회연합회 회장

서울노회유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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