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함, 아름다움을 매개로 이뤄진다"

"신학함, 아름다움을 매개로 이뤄진다"

[ 최근신학을 읽다 ] 신학과 예술의 만남

김성진 기자 ksj@pckworld.com
2018년 06월 08일(금) 10:00
신학과 예술의 만남, 그것의 필요성에 관해



오늘날 신학과 예술의 만남은 그야말로 르네상스다. 문학, 영화, 미술, 음악, 춤 등 각 장르별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양자의 만남은 신학적 미학 혹은 미학적 신학이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신학 안에서 미미하나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교회 및 신학이 예술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예술이 가진 영적인 영향력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형태로나 감정을 표현하는 형태, 혹은 메시지를 생산해내는 형태로든 예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감화력을 끼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한편으로는 비판적인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에 대한 바른 태도와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 예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직은 예술창작을 통해 신학함(doing theology 신학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일체의 활동)을 실천하는 것이 대부분이나(미학적 신학), 예술작품을 신학함의 대상으로 삼거나 예술 경험을 신학함의 출발점으로 삼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신학적 미학). 그러나 신학 내에서는 여전히 소수자의 위치에 있다. 좀 더 효율적인 만남과 결실을 위해 양자의 만남이 왜 필요하며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신학이 그동안 진과 선의 문제에만 전념하고 미의 문제를 소홀히 여긴 결과는 참담했다. 네덜란드 미술사 비평가인 한스 로크마커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미술을 관심 밖에 두었을 때 나타난 결과를 '현대예술과 문화의 죽음'으로 표현하였고,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어스 폰 발타자르는 경직된 신학이 태동한 중요한 이유라고 보았다. 심지어 에드워드 페얼리는 신앙의 폭력성을 보았으며, 프랭크 버치 브라운은 신학은 본질에서 미학적이라고 말했다. 미와 관련한 몇몇 견해들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신학이 제 역할을 다하고 또 유연성을 발휘하기 위해선 미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함이다.

2. 미의 문제를 소홀히 한 이유는 감성을 지성에 비해 열등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뇌 과학의 연구에 따르면, 이런 견해는 더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 오히려 감성적인 작용이 이성적인 인지행위에 앞설 뿐 아니라, 감성이 이성의 작용을 지배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이는 뇌 측두엽에 있는 감정을 조절하는 편도체가 중추신경계보다 먼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진과 선에만 집중하고 감성적인 지각을 등한시 여기게 되면, 신학적인 인식 과정에서 실세를 간과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면서도 감성에 휘둘려 그릇 행할 뿐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진리를 포기하고 거짓을 선택하는 일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신학이 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지성과 의지뿐 아니라 감성의 문제에도 관심을 돌리고, 또한 지성적인 인지만이 아니라 감성적인 지각도 신학적 인식과정에 포함시켜야 한다.

3. 엄밀히 말해서 신학은(만일 신학이 숱한 이론들의 미로로 빠지지 않고 독자적인 사유를 전개하려 한다면) 감성적인 지각으로 시작한다. 예컨대 창세기 1장은 물질의 기원을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전제하고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설명한다기보다는 자신의 현 위치에서 지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또 제 기능을 발휘하는 이유와 목적을 하나님에게서 보았던 신학자의 고백이다. 그 후 이어지는 기록은 이웃하는 종교의 신적인 대상들을 포함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지각 경험을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바탕으로 인지한 결과다. 그 결과 신적인 의미를 갖는 존재들 역시 과감하게 하나님의 질서로 편입한다.

4. 고대 근동지역의 창조신화들과 비교할 때 특이한 것은 존재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다고 본 것이며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평가하며 기술한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기서 "좋았다"는 말(토브)은 '아름답다'는 의미를 포함하는데, 폴란드 미학자 타타르키비츠는 이 말이 히브리어 용례에서 '성공적'이라는 뜻에 가깝다고 말한다. '샬롬'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 상태를 염두에 둔 표현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곧 히브리인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 상태를 '평화'로 이해했다. 힘에 의한 평화가 지배적인 시대임을 염두에 둔다면 매우 신선한 이해라고 볼 수 있다. 샬롬을 인사말로 사용하는 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원하는 의미가 있으며 또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살 것을 환기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창조 기사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지각한 후에 이것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되었음을 밝히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평가한다. 곧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며, 사람들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말씀에 따른 것이 아니면 하나님은 아름답다고 보지 않으신다는 의미다.

5. 바로 이 지점에서 신학은 예술과 만난다. 다시 말해서 신학은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를 전제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지각 경험은 신학자의 사유가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신학함은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미적 경험)을 매개로 이뤄질 수 있다 함이다.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평가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은 아름답다고 지각하는 경험과 그 경험을 성찰하면서 구성된 신학을 비판하며,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행위를 인지하며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도록) 현실을 재구성할 뿐 아니라 그에 따라 신학을 재형성한다.

6. 아름다움이 신학에서 배제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학함을 경험이나 독자적인 문제의식으로 시작하지 않고 특정 신학자의 문제의식과 거기서부터 형성된 신학이론에서 시작하는 관습 때문이다. 지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묻는 인식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학함의 방식과 신학이론 구성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신학이 경험에서 시작한다면, 아름다움은 충분히 신학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인간의 지각을 매료해 대상에 주목하게 하고, 그것에 대한 공감을 유발하며, 그리고 우리 안에 어떤 기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선 일탈을 초래하기도 한다.

7. 아름다움이 갖는 신학적인 함의 때문에 신학과 예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상호작용을 해왔다. 신학과 예술의 만남에서 관건은 특정 예술 장르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미적 경험을 매개로 하나님 경험에 이르는 것이며, 이것을 신학주제에 따라 성찰하면서 마침내 계시된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인식을 삶으로 옮겨놓는 작업 역시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일이다.

창세기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앙은 모든 삶의 현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도록 하되 지각 경험에서 출발한다. 그렇다고 신앙이 지각 경험에 갇히는 건 아니다. 하나님은 지각 경험을 넘어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을 매개로 경험되며 또한 그것은 또 다른 지각 경험을 일으키는 방식(글, 영상, 그림, 춤 등)으로 표현된다.

신학은 미적 경험으로 시작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름답지 않은 현실 경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고백할 이유를 설명한다(숨어계신 하나님).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현실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각할 뿐 아니라(시19편, 계시하시는 하나님), 그것을 합리적으로 기술한다(신학). 이때 예술은 신학자가 일정한 주제와 관련해서 성찰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지각 경험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주어 결과적으로 새로운 방식의 신학함을 촉발한다. 바흐와 같은 음악가는 특정 신학을 음악적으로 표현해내었지만, 때론 인상주의 화가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예술 작업을 통해 현상으로부터 본질을 포착해내어 스스로 예술 신학을 실천하기도 한다.

8. 신학과 예술의 만남은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 경험을 매개로 이뤄진다. 매혹하는 아름다움이 신앙을 흔드는 유혹이 될 수 있으나, 세상의 구원은 신학적인 아름다움으로, 곧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는 그동안 진과 선을 통해서만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 경험은 진과 선에 대한 인지적인 경험을 압도하여 더욱 총체적인 경험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삶의 아름다움, 글의 아름다움, 관계의 아름다움 등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시한다. 믿음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는 이 땅이 다시금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곳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위해 신학은 예술과의 만남에서 구체적인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최성수 목사(영화 및 문화 평론가, 신학박사, 순천중앙교회 교육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