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목사님이 그립다

이런 목사님이 그립다

[ 주간논단 ]

김승학목사
2018년 05월 14일(월) 14:11
김영옥 목사는 18세인 1884년, 황해도 소래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평생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지역사회와 민족을 위한 거룩한 사역에 전념한 목회자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주의 종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생명을 다해 헌신했던 믿음의 선배였다. 목사로 임직하기 전에는 매서인으로, 조사로, 영수로, 장로로 초기 한국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한 평신도 리더였다. 목사로 임직을 받은 이후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살았다. 안동교회를 포함해 여러 교회에서 시무할 때 교회들은 활기가 넘쳐났고, 부흥을 경험했다. 특히 안동교회가 1910년에 첫 번째 예배당을 건축할 때 조사였던 자신에게 선교사가 준 노새를 팔아 건축헌금으로 드렸고, 1913년 두 번째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도 선교사가 선물로 준 가옥을 팔아 헌금했던 헌신의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안동교회, 경산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경주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풍기성내교회 등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모 교회들의 기초를 튼튼히 닦아 지역의 거점 교회요 중심 교회가 될 토대를 마련했다. 이들 교회는 설립된지 10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역을 잘 섬기는 중심 교회로 소문나 있다.

더욱이 김영옥 목사는 지역과 민족을 위해 섬기고 봉사해야할 일이 있다면 주저함 없이 교회의 사역을 그 일에 집중하여 용기 있게 실행에 옮겼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영적 권위가 있었고, 교인 뿐 아니라 주민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됐다. 그는 노회나 총회에서 규칙부와 재판부의 무거운 짐을 도맡아 정의롭게 처리했다. 이러한 그의 섬김은 후대에도 이어져 손자인 김형태 목사(연동교회 원로)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2회 총회장으로 총회를 섬기게 했다. 또한 그는 기미년 안동 3.18 만세운동의 주역이었고, 사월교회를 시무할 때는 경북 일대의 장로교 지도자들에게 비밀리에 독립공채 모집을 독려했으며, 포항교회를 섬길 때는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를 포항에 설치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래서 그가 섬겼던 교회는 항상 일제의 눈에 가시와 같았고, 주시(注視)와 감시의 대상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도 나라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애국자 중의 애국자였다. 그는 교회가 민족정신의 보루(堡壘)요 민족운동의 근거지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김영옥 목사에게 목회와 사회, 목회와 국가는 결코 분리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영옥 목사는 일제 강점기, 광복, 건국, 6.25전쟁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여러 차례 검속과 체포 등으로 고초를 당했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나 다시 교회로 돌아왔고, 그에게 주어진 목회에 충실했던 독립운동가요 애국자요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었다. 김영옥 목사에게 교회를 섬기는 일과 국가를 위한 일은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에 늘 고난의 자리에 있었지만, 동시에 거룩한 흔적을 남겼다. 김영옥 목사는 성도를 위한 사랑의 목자였고, 지역 사회와 국가를 사랑한 공의의 지도자였다. 날마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통해 얻은 영적 통찰력과 지도력은 그로 하여금 교회나 사회적으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게 했다. 차별금지법, 동성애, 이슬람, 많은 이단의 거센 도전과 공격 등 혼란하고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들은 심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교회를 흔드는 현안에도 다수의 목회자들은 서로 연합하는 일에 몸을 사리고 있다. 또한 침체되고 있는 교회의 위기상황에도 무기력과 무관심한 모습을 보며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얼마나 속이 상한지 모른다. 굳센 믿음과 혜안(慧眼), 그리고 넘치는 용기와 열정으로 교회와 민족을 가슴에 껴안고 거룩한 삶을 살며 통전적 사역(holistic ministry)을 감당한 김영옥 목사님이 요즘 그리운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김승학목사

안동교회

{김승학목사}